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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빈 집에 대한 시

by 발비(發飛) 2005. 5. 9.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김선우

 

불현듯 강바닥으로 내려앉는
빈집
황지였나 사북이었나
고분처럼 폐석더미 쌓인 마당
발가벗은 아이 혼자 놀고 있었다
무엇이 고팠던 걸까
어린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토닥토닥 흙집을 만들던 마당가
이따금씩 개미가 손등을 타오르고
폐석더미 옆 고즈넉이 깨꽃 붉었다
흰 구름 데리러 간 엄마는 왜 안 오나
깨꽃 입술만 흙집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빈집

 

박형준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 보고
달빛이 신어 보고
소리 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낑낑거리는 개는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칫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빈집

 

송재학

 

나는 오래 폭설을 기다렸다
해평마을의 빈집은 해면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랑, 낙동강의 결빙음, 매지 구름은
내 육체가 붙들던 난간이었다
간유리문을 지날 때 어딘가 지독하게 아프다가
물바람마저 사금파리 빛 띄우면
히말라야시다는 가지 꺽고 귀로를 가로막는다
입술이 닿은 성애꽃에 매달린 내 청춘이
온기 한 점 구하지 못할 때
빈 집은 폭설로 무너진다
그 사랑에는 육체를 피한 흔적이 있다

 

 


빈집

 

윤성택

 

빛 바랜 라면봉지가 반쯤 묻혀 있다
어디로 떠난 것인지
기억하기엔 너무 오래된 이름들,
비포장도로 끝에서 먼지로 불어와
빈 농약병 소도록한 뒷마당을 지난다
무너진 담장 넘어
녹슨 자물쇠를 비틀어보면
마루 밑
고요한 그늘이 숨죽이고,
마당 가운데
웃자란 잡초들이
지나는 바람소리에 기웃거린다
뒷산 대숲을 파랗게 굽이치는 참새떼
수취인불명의 하늘을 날아오를 때
나방 한 마리,
소인(消印)처럼 거미줄에 걸려
흔들리고 있다

 


빈집

 

이향지

 

물통엔 물이
반쯤 남아있다
평상 위에는 목침 하나
바람도 주인 따라
들에 나가고
빈 집
저 큰 입 속에
배고픈 햇살만 쟁쟁

 


빈집

 

이화은

 

아무도 닫아 주지 않는
외짝 문 아직도
바람에 시달리고 있다
시간이 지나쳐 버린 거기
민들레의 봄이 노랗게 피어난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

 


빈집

 

황금찬


이 벌판에
버려진 빈집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 빈집의 주인이 된다.
잠시 머물렀다 가겠지만
그래도 주인이다.
문을 열고
해와 달을 불러 들이고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바람과 별을
친구로 모신다.
백자연적에
구름이 앉아
자주 피어오르는
표음문자를 정성 들여 세고 있다.
지금 내 앞으로
흐르는 강물은
어디까지 흘러야 끝날까
눈을 뜨면 광명한 우주
그 다음엔 어두운 세계
나는 지금 그 사이에
빈집 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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