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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백석] 여승

by 발비(發飛) 2005. 5. 9.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난 시인이 된다
 
우연히 들른 절에서,
가지취냄새가 선명한 여승의 탁발식을 본다.
어디서 보았을까?
난 그녀의 탁발식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가지취냄새를 쫓아간다.
여승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난 여승을 쫓아 움직이고 있다
 
오래전 어느 여름날
평안도 어느 곳을 지나다 낯빛이 유난히 파리한 아이업은 여자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가지취를 파는 여자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아이는 여인의 등뒤에서 연신 울기만 하고
여인은 아이를 업은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고 있다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는 여인은 물기마른 가을낙엽소리를 내었다
가을 낙엽처럼 울던 여인은
업은 아이가 잠들때까지 업은 등뒤의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다음여름날,
여인은 그 자리에 없었고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다
여인의 남편은 북쪽어디론가 가서 영영 소식이 없고
여인의 등뒤에서 엉덩이를 맞으며 잠들던 딸아이는
자글거리는 도라지밭옆 돌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여인은 가지취나물도, 옥수수도 팔지 않았다
 
여승의 탁발식이다.
몇 해나 지났을까
그동안 여인은 파리한 얼굴로 검은 머리 오리 한 웅큼 한 웅큼을 떨구며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떨구어지는 머리칼과 머리칼만큼 가는 눈물방울이 여승의 어디에선가
흐르고 있다.
파리한 얼굴이 촉촉해지고 있다.
 
가지취냄새가 나는 여승을 만난 날
산꿩도 울고, 나무도 울고,
나도 ......
 
내가 만난 여승이다.
여승
그리고 여인
살아가는 이름이다.
 
몇 줄의 시가 마치 tv문학관 한 편을 보는 것처럼 그려진다.
백석
그의 시 몇 줄을 읽으며
글에는 없는 이야기들이 선명히 그려지는 것
백석의 능력이다
그의 시.
그림같은 시.
보여주는 시
그가 보여준.. 몇 줄의 시가 나에게 긴 이야기로 들린다.
시인의 시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그림... 그렇구나
그림이구나.
 
시는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은 시로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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