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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걸음 — 조심스러움과 용기

하찮해진 일요일

by 발비(發飛) 2026. 1. 18.

길을 가다 내 또래의 사람들과 스쳤다.

희끗한 머리에 캐주얼도 정장도 아닌
어정쩡한 옷차림.

출근길의 긴장도, 퇴근길의 안도도 없이
그냥 걷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찮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들도, 그도
이제는 세상에서 꼭 필요해 보이는 존재는 아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지 않고,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 얼굴도 아니었다.

서로에게  건강하세요,라는 인사를 덕담처럼 건넨다.

오늘 그는 일요일이라 늦잠을 잔다고 했다.
몇 시간 뒤에는 영화를 보러 갈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좋다거나 부럽다거나
특별한 감정을 보태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대화는 짧은 문자 몇 개로 충분했다.
통화를 하지 않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늘따라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하찮해진 사람들이
각자의 하루를
각자의 속도로 보내는 것처럼,

그와 나는
각자 잠을 자고,
각자 영화를 보고,
각자의 일요일을 살고 있었다.

붙잡지 않아도 흩어지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찮해졌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애써 중요해 보일 필요가 없어진 상태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그와 나도
그 하찮함 안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조용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일요일 오후다. 

용기있는 하루다. 

오늘의 용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용기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용기란
관계를 밀어붙이지 않고도
오늘 하루를 그대로 통과시키는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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