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는 트레킹을 했고, 나는 온종일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와 나의 하루는 몸이 움직인 날과 마음이 맴돈 날로 나뉘어 있었다.
저녁 무렵, 트레킹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다며 전화가 왔다.
세번째 통화였다.
오늘 걸었던 코스 이야기, 저녁을 거르고 있다는 말, 그리고 최근에 보고 있다는 넷플릭스 드라마로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드라마를 빨리 보기 위해 1.2배속으로 본다고 했고, 나는 1배속으로 보다가도 놓친 대사가 있으면 다시 되돌려 본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를 무슨 공부하듯이 본다고 했고, 나는 예전 회사에서 했던 일때문에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에 대해 집중해서 된 습관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살아왔다는 말까지는 닿았지만 그 뒤의 이야기까지는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걸렀던 저녁이 먹고 싶어졌다고 했기 때문이다.
저녁 생각이 없다가도 말을 좀 하다보면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 순간이 있고, 또 배가 고플 시간이었기에 그가 끊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통화가 끝난 뒤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아쉬움. 이건 서운함도 불안도 아니다.
그저 내 이야기가 내려놓을 시간을 얻지 못한 채 잠시 공중에 떠있게 된 것일 뿐이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다름을 말로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 이야기를 매듭짓는 기술은
아직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며칠 전 불면증 때문에 늦게 먹었던 약기운으로 오전 열시가 넘도록 자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아침인사차 전화를 했다.
잠에 취해 깨지 못한 내 목소리를 듣고는 잠을 깨워 미안하다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그는 굿모닝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배려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일어났다는 신호로 굿모닝을 카톡을 보내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게, 그런데도 어딘가 아주 옅은 섭섭함이 남았다.
우리는 아직 흔히 말하는 썸타는 중이고,그 상태로 먼 거리에 있다.
만나면 괜찮은 일들이 통화나 메시지 속에서는 자꾸 남는다.
끝나지 않은 말들처럼.
오늘 그는 많이 걸었고,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마음을 조심해야 할 목록에 올려두었다.
나는 이 관계에서 설명받지 않아도 되는 섭섭함을
내 쪽에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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