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 두 살, 그 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
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어떻든 그는 혹은 그녀는 쓰고 싶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그가 혹은 그녀가 쓰는 말은 모두 그이며 그녀이다. 그댈 만지고 싶은데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
쓰고 있으나 만지고 싶다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 혹은 그녀는 세상에게 밟혔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본다
세상을 써야 하니까, 그들의 세상을 써야 하니까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그 혹은 그녀는 불순하다 세상에서 조합하지 못한 것들을 쓴다는 것으로 감히 조합하려든다
오직 상상만으로 그 혹은 그녀의 그대는 그 혹은 그녀에 의해 멋대로 의미되어진다.
그 혹은 그녀의 그대는 욕조에 누워있지 않으며 사과를 먹고 있지 않을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 혹은 그대의 심장 역시 존재치 않는다
열 두 살, 그 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껍데기, 그 혹은 그녀, 껍데기를 �고 나온 그 안에서 그녀, 그 후 그는 그 혹은 그녀가 되었다
밤을 헤매는 쥐와 같은 사내들에게 그녀는 연애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사내를 사랑하는 듯 했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닌 그녀가...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
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강렬해지고)
-쓰고 있으나 변명이다
다시 그 혹은 그녀가 되었다. 그의 그대를 만나도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녀의 그대를 만나도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거짓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약속은 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 몰라... 그 혹은 그녀로서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어느 날 누군가 하얀 교복을 입은 내 등에 볼펜촉으로 눌러대던 적이 있다
돌아보지 않았다 이길수 없었으므로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쓰고 있으나 반항이다
힘없음, 구별됨, 다름에 대해 쥐떼들은 어둠을 틈타 힘을 과시했다 어둠 속에서 쥐들은 무슨 짓이든 했다
그 혹은 그녀는 어둠 속에서 쥐들에게 갇혀있었다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그 혹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견디는 것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가만히 견디는 것 시간 따위는 없다
그 시간에도 쥐들은 곁에 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모른다. 그 혹은 그녀는 견디기만 했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세상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다 쓴다
아직 쓰고 있는데 그 혹은 그녀는... 그만했으면 ... 사라져라... 세상? 아니면 그 혹은 그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다중
그 혹은 그녀에게는 함께라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 혹은 그녀의 그대조차 감시자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어쩌겠니?
원래 그러했던 것을... 그 혹은 그녀는 그녀라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으나 믿지 못한다 그대들은
무엇을 믿고 싶은 것인지 그대들이 그녀를 창조하였다는 것인지
그녀의 그대 착각안에 그녀가 언제까지 견디어야 하는 것인지... 그 때를 차라리 말하라
시코쿠, 시코쿠,
-이름이 있다 자리가 있다 미래가 있다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쓰기를 멈춘 그녀는, 붉은 입술을 칠하고 뛴다 어쩌지 계속 뛰어야한다 잡히지 말아야 한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그녀와 같았던 사람이 앞에 있다 그녀와 같았던 사람이 앞에 간다 없는 것을 쫓아가는 그녀와 같은 그녀
그녀의 뒤에도... 언제나 있다 다만 그것이 나일뿐이다
뛴다, 도마뱀은
-뛰어라 도마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언제나 뜨거운 태양아래 붉은 장미는 피고 붉은 장미는 언제나 피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꽂히는 날에만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알았다
그와 그녀가 함께 하는 '나' 함께 하는 '나' 함께 하는 '나'
온 몸을 둘이 겹쳐살지 말아야 한다 머리와 꼬리로 나누어 머리는 그에게 주자 꼬리는 그녀에게 주자 머리와 꼬리가 사랑을 나누게 하자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더 강렬한 거짓말
너 누구니? 나? 그!
너 누구니? 나? 그녀!
뻔뻔해진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나는, 그 그리고 그녀
기다리라, 기다리라!
-기다리라 기다리라
머리에서 그가 꼬리에서 그녀가 두 몸에서 네 손으로 모두를 더듬어갈 때까지 네개의 손이 세상을 확 덮칠 때까지 기다리라!
그때가 되면
그 그리고 그녀에게 '똥'이라고 쓰는 세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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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정체성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교포 2세, 입양아, 혹은 동성애자들만이 겪는 일은 아니다.
단단함과 단단하지 못함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은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황병승 시인의 여장남자 시코쿠를 정체성의 문제로 읽었다.
시인의 눈에서 보였던 강렬함, 그럼에도 촛점이 없음이 놀라웠던 어느 날이 있었다
웃지 않는 시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돌았을 때의 놀라웠던 얼굴 근육들의 움직임,
그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 움직이는 근육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엄청 커다란 근육들의 움직임.
머리와 꼬리가 모두 웃는 모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야....
그의 시를 한 줄씩 읽어나가면서 명확해지는 시인의 얼굴
시와 시인이 같은 경우
시와 시인이 너무나 다른 경우
시인을 본 후 시가 선명히 보였던 신기한 경험, 그는 여장남자 시코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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