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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나희덕] 기억의 자리 외

by 발비(發飛) 2005. 11. 16.
LONG

기억의 자리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 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볼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어떤 그물

 

나무들이 공중 가득 펼쳐놓은 그물에

물고기 한 마리

잠시 팔딱거리다 날아간다

 

나무그물은 상하는 법이 없어

물고기 날아오른다

비늘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열렸다 닫히는 그물 아래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들

 

누군가 물을 건너가는지

흰징검돌 몇 개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그물 위로 흘러가는 물결 속에는

 

저렇게도 많구나

나무들이 잡았다 놓아 준 물고기들이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네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지옥으로

다시 지옥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가야지 어서 가야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난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 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드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를 그대는 알아보겠지.

 

 

일곱살때의 독서

 

제 빛남의 무게만으로

하늘의 구명을 막고 있던 별들, 그날 밤

하늘의 누수는 시작되었다. 하늘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별똥별이

떨어질때마다 하늘은 울컥울컥 쏟아져서

우리의 잠자리를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디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전갈의 붉은 심장이

깜박깜박 울던 초여름밤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바닷가 어느 집터에서, 지붕도 바닥도 없이

블럭 몇 장이 바람을 막아주던 차가운 모래

위에서 킬킬거리며, 담요를 밀고 당기며 잠이 들었다

모래와 하늘, 그토록 확실한 바닥과 천창이

우리의 잠을 에워싸다니, 나는 하늘이 달아날까봐

몇 번이나 선잠이 깨어 그 거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 밤 파도와 함께 밤하늘을

다 읽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그날 밤 하늘의 한 페이지를 훔쳤다는 걸

그 한 페이지를 어느 책갈피에 끼워 넣었는지를

 

나뭇가지가 오래 흔드릴 때-편지2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때

그 여운 속으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 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젖지 않는 마음-편지 3

 

여기에는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보면

발 끝에 쨍쨍 깨지는 슬픔의 돌맹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저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가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종종 뜨기를

 

잔설-편지4

 

잔설처럼 쌓여있는 당신,

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이 있어

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적 어딘가에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굴참나무, 사람주나무, 층층나무, 가문비나무......

나무 몇은 아직 눈 속에 발이 묶여 오지 못하고

땅이 마르는 동안

벗은 몸들이 새로운 빛을 채우는 동안

그래도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잔설이 그려내는 응달과 양달 사이에서

 

태풍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 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었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람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은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일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적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ARTICLE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같은 거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딴소리부터-

 

이틀인가, 사흘인가,

시만 올려두고 그냥 내버려두고 말이 하고 싶지 않아서 읽기만 했다

마치 내가 시들을 유기하는 듯한 느낌.

내가 얘네들을 내 집으로 데리고 와 놓고,

너 혼자 놀아라... 난 내 일 할꺼다. 그렇게 한 느낌.

시들에게 아는 척을 해야겠다.

나의 집에 온 것을 시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잘 왔다는 생각이 들도록.

혹 내가 떠드는 것이 맘에 안 들 수 있겠지만,

데리고 올때는 분명 사랑스러워서 데리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알겠지?

 

 

 

낮에 있었던 일이다.

책상위로 빨간 개미 몇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 시에 보니까, 개미의 길을 문지르면 개미가 길을 잃고 헤맨다는 데, 진짠까?

앞의 개미가 지난 길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그리고 뒤에 온 개미길도... 아무튼 책상위를 마구 문질렀다.

개미는 끄떡도 않고 그냥 가더라.

시인과 시인네 집 개미, 그리고 나, 내 책상위에 개미.

이들 중에 제일 똑똑한 것은 내 책상위의 개미였다.

 

나도 시인처럼 개미처럼 뭉개놓으면 길 못 찾는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헤매게 만들고 만다.

어쩌면, 난 이미 길을 잃어버린 개미일게다.

난 최대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민폐를 끼치지 않는 방법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애쓴다지만, 이미 길을 잃어버렸다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갈 길을 잃어버린 나는 가만히 있자.

 

그리고 제 길을 가고 있는 어떤 이가 내 앞을 지나거든,

물어보자.

"혹시 길 아세요? 길 잃어버린 분 아니시죠?"

그렇게 꼭 물어보자.

그리고 안 잃어버린 사람의 뒤를 조심조심 따라가 보자.

그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도착할 것 같다.

 

나, 길 잃어버린 거 맞지?

오늘부터 누가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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