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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범일동 블루스

by 발비(發飛) 2008. 10. 22.

범일동 블루스

 

손택수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고 있는 사람같다. 새시문과 새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소공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 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어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골목길.

 

3

저물녁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 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새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자다 깬 집들이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스럭거린다. 이 은근한 소리, 눈치껏 가려주고 가는 한밤의 빗소리

 

 

 

 

내 집을 구경하려면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

 

범일동 달동네에 사는 사람이 새시대문 안에서 걸터앉아서 자기 집을 구경할 수는 없다.

집 밖으로 나와 ...

내가 사는 집이 아니라...

구경하는 집이 되어야 집이 보인다.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수다를 떨어대는 입바른 아줌마가 햇살로 보이기도 하고

그 아줌마 못지 않게 나이론 슬리퍼에 낡은 츄리닝을 입은 백수 아저씨의 동네에다 풀어놓는 푸념들이 바람으로 느껴지기도 하는거다.

 

몸을 담벼락 삼아 살고 있는 나라는 영혼.

 

 

 

 

 

-잠시 딴 소리-

 

 

어제는 오랜만에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그저께 갑자기 생각났고, 전화를 드렸고, 내일보자하시어 어제 갔었다.

 

"선생님, 마치 물이 마시고 싶은 느낌처럼 선생님이 뵙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인간의 자기장이야."

 

그렇게 포도주에 슬라이스 치즈를 놓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했었다.

 

"선생님, 뭐가 무거운 것이 답답해요. 어찌 할까요?"

"앞이 희미하면 뒤를 봐. 그렇다고 과거에 주눅들면 안돼. 과거는 답일뿐이야. 니가 걸었던 뒤를 보면 언제나 명백한 과거가 보일거야.

 그게 답이야."

 

명백한 답을 주는 과거. 미래의 답은 과거에 있다.

 

"선생님, 전 자유롭고 싶어요."

"자유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움직이는거야. 차라리 당장 나가 어느 남자의 손을 잡아봐. 그게 너를 자유롭게 할거야."

 

움직여야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선생님, 다수의 무리 안에서 있고 싶어요."

"니가 생각하는 다수는 이미 다수가 아니야. 니가 다수라고 생각하는 순간 넌 다수에서 벗어나는 것일뿐... 그건 상실이지."

 

그렇게 두시간 남짓을 공과 사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했다.

포도주는 두 잔을 마셨을 뿐이다. 슬라이스 치즈 한 장과 함께...

 

" 저 갈래요..."

"벌써?"

"그냥 갈래요... 이젠 됐어요.. 선생님을 만나면 될 줄 알았어요. 가겠습니다."

"그래 가라."

 

-잠시 딴 소리 끝-

 

 

 

 

 

세상과 몸이라는 담벼락 하나를 두고 사는 나는

몸이 몸과 딱딱 붙어서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는 달동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내 안에 수십명의 혹은 수백명의 내가 들어앉아 달동네 합판 집처럼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보이며...

간혹은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숨기며..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이제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내 몸안에는 범일동 달동네가 들어앉아있다.

햇살과 바람의 모습을 한 이웃들이 나를 비춘다. 어김없이 드러난다... 간혹은 흔들린다.

충돌이다! 내 몸 안에서 수십명 수백명의 내가...

 

내 몸 바깥에은...

그곳도 몸과 몸들이 딱 붙어있다.

이것 또한 더는 알 것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동료라는 이름으로...

볼 꼴 못 볼 꼴들을 보여주고 보고...

서로에게 햇살이 되기도 하고 바람이 되기도 하고 숨기고 싶기도 하고... 간혹은 신음 소리를 밖으로 보내고 싶기도 한

범일동 달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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