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대설주의보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뒤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나, 지금부터 굴뚝새
눈은 나만해. 어떤 눈은 나보다 더 큰 것도 있어.
눈 사이를 날아가는데, 눈이 내 위에 올라앉아서 난 땅으로 떨어질 뻔 하기도 했지.
그런 눈 사이에 바로 꽂히는 거였는데.
그래서 나?
날개를 있는 힘껏 파닥거렸지.
눈은 덩어리였는데, 내가 날개를 파닥거리자 부서지면서 아래로 떨어졌지.
그래서 알았지.
눈은 나만한데, 난 부서지지는 않는데, 눈은 부서지는구나...
그 때부터 난 다시 힘껏 날기 시작했어.
눈은 계속해서 내리는거야.
잠시 하늘을 보았는데, 그저 하얀 하늘이 떨어지는 것 뿐이더라고.
다행이지 한꺼번에 하늘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천천히 부서지면서 떨어지는 것이라서.
난 날았지.
문제는 눈이 아니었어.
눈때문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잃어버렸던 거야.
내가 매일 날아오르던 상수리나무가 없어져버렸고,
내가 물을 마시던 작은 옹달샘도 보이지 않았고,
문제는 눈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놀던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찾았지. 찾아다녔지.
사방이 하얀데서 이제 갈 곳을 모르겠더라구.
날던 방향의 반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는 아니었었나봐. 그랬다면 벌써 왔었겠지.
그저 날았지.
내릴 곳이 없으니까, 그저 날았지.
하늘에서 정지하는 법, 나 알잖아. 한참을 날개짓하다가 잠시 멈추어도 떨어지지는 않거든
그랬지 뭐, 그렇게 하늘위에서 날개를 편 채 쉬기도 했지.
그때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지.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무가지가 꺾였고, 눈이 떨어져내렸지.
그래서 알았지. 그 소나무는 내가 지난 번에 작은 벌레를 잡아먹었던 바로 그 소나무거든.
아 그렇구나. 나 이제 여기가 어딘지 알겠다.
그리고 방향을 좌로 15도 틀었지.
날고 날았지.
내가 얼마를 날아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 같은데.
난 아마 눈속을 뺑뺑 돌아았었나봐.
이제 정말 좀 쉬어야겠어.
날개를 접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눈내리는 하늘을 날 때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는 것 같아.
가서 자야겠어.
날 깨우지마.
이 눈이 다 내리고, 다 녹을때까지 난 눈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거니까.
그렇지만, 하얀 눈속을 다녔던 것은 아마 평생 기억할 것 같아.
첨 만나는 것이었거든.
나만 본 거겠지! 나 들어간다.
ㅎㅎ, 이렇게 주절거려본다.
최승호시인의 시는 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180도 다른 시이지만,
난 눈내리는 날 그저 골치아픈 인간사는 잊어버리고 굴뚝새만 되어보기로 했다.
대설주의보가 내리는 날,
난 출근길 눈의 흔적만 보았을 뿐, 오늘 난 눈을 맞은 적도 본 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