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김규동 소시집]두만강에 두고 온 작은 배

발비(發飛) 2006. 2. 28. 17:33

두만강에 두고 온 작은 배

 

김규동

 

가고 있을까

나의 작은 배

두만강에

 

반백년

비바람에

너 홀로

 

백두산 줄기

그 강가에

한줌 흙이 된 작은 배

 

천(天)

 

규천아, 나다 형이다.

 

*규천은 1948년 1월 평양에서 헤어진 아우의 이름.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 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 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시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아, 통일

 

이 손

더러우면

그 아침

못 맞으리

 

내 넋

흐리우면

그 하늘

쳐다 못 보리

 

반백년 고행길 걸은

형제의 마디 굵은 손

잡지 못하리

이 손 더러우면

 

내 넋 흐리우면

아, 그것은

영원한 죽음.

 

느릅나무에게

 

나무

너 느릅니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아름드리로 자라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느냐

8.15때 소련병정 녀석이 따발총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육체로 들어간 진달래

 

먹었단 말입니다

연한 이파리

무지개 같은 진달래를

순이와 난 따 먹었어요

함경도의 3월은

아직 쌀쌀하나

허전한 육체에

꽃은 피로 녹아

하늘하늘 떨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평안도 약산 시인은

노래했으나

밟고 가다니 사치하잖아요

먹었단 말입니다

심장으로 들어가게 했지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리겠노라

전라도 강진 시인은 노래했으나

도대체 뭘 기다리란 말인가요

모란이 뭔지도 모르는 바람 센 땅에서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린 불 붙듯 하는

진달래를 따 먹었어요

 

여름내 땀 흘려 농사짓고

겨울엔 이태준의 <문장>잡지를 읽는

이름없는 농부의 딸 순이와 나는

입술같이 연한

진달래 이파리를 따 먹었어요

 

순인 북에 있고

난 남쪽에 있으나

둘의 심장으로 들어간 진달래꽃만은

세월이 가도

고동치며 돌고 있답니다

사시사철 꽃은 피고 있답니다.

 

나비와 광장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 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 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의 조수에 밀려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숭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 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달아오를 아궁이를 위한 시

 

시가 안 되어

별짓 다 해보다

아궁이를 뜯었다

동서고금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이것저것

외워도 보고

그것을 쓸 때의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마감날은 지났는데 고민하던 끝에

아궁이를 뜯었다

앞집 아주머님네는

팔만 원 들여 온돌까지 뜯었지만

그런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만만한 아궁이를 뜯었다

시꺼먼 연탄을 두장씩 삼켜먹고도

얼음장인 이 온돌은 도대체 무엇이냐

검붉게 썩은 방바닥이 발이 시리다

저주스런 방이다

쌍말로 빌어먹을 온돌이다

정을 대고 망치질을 해서 뜯어낸 다음

허리 아래 묻혔던 화로를

가슴팍까지 끌어올려서 묻고

급한 성미에 맨손으로

시멘트를 반죽해서

든든하게 발랐다

완전히 반나절이 걸렸다

이까짓 일을 하는데 반나절이 걸린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시를 쓴다더니 뭘 하느냐고 놀럈다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로

담배를 한 대 피워물고

무슨 커다란 자신이라도 선 것처럼

한마디하였다

이젠 틀림없을거요

어디 불 한 번 넣어보시오라고

빔낮 무슨 실험 같은 것이냐 하고 사는

이런 남편을 믿고 평생을 하는 아내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으나

마음은 새로이 안정을 얻은 듯 싶었다

저녁에

대학을 마치고

회사에 다니는 큰아이가 퇴근하고 돌아와

모래 되어 쓰러진 애비보고

한마디 수고했다는 인사도 없이

족보애 없는 음악을 듣고 앉았는 것이

약간 서운하기는 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