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花潭 서경덕] 詠菊

발비(發飛) 2006. 1. 23. 13:05

詠菊

 

花潭 서경덕

 

 

園中百卉已肅然 정원의 모든 꽃 이미 시들었는데

祗有黃花氣自全 노란 국화만이 기운 온전하네

 

獨抱異芳能殿後 홀로 남다른 향기 품고서 뒤로 쳐져

不隨春艶竝爭光 봄꽃들과 앞을 다투지 않네

 

到霜甘處香初動 서리 내릴 즈음에야 비로소 향기 뿜고

承露溥時色更鮮 이슬에 젖어 있으면 빛깔 더욱 곱다네

 

飡得落英淸五內 떨어진 꽃잎 씹으면 온 뱃속 맑아지기에

杖藜時復繞籬邊 지팡이 짚고서 때때로 울타리 가를 맴돈다네

 

 

 

 

 

이 겨울에 웬 서리맞은 가을국화시에 필이 꽂혔지?

그저 하루 들락거리면서 읽어보기로 한다.

서리 맞은 가을국화는 봄꽃들과 겨루지 않음...

물론 이 시를 쓰신 화담선생과는 다른 느낌이겠지만,

그저 2006년을 살고 있는 내게는 어떻게 올런지, 오늘 하루 그의 황국에 젖어들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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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같은 계절이 아니다.

지금같은 공간이 아니다.

지금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 어떤?

 

음력 11월 말즈음 찬 날이다.

바람도 한 점 없이 아주 쨍하게 차기만 한 날이다.

마당엔 작은 연못 하나 있고, 그 연못엔 살얼음이 곧은 줄을 그으며 얼음이 끼어있다.

얼음아래로 비단 잉어 두 마리쯤 헤엄치고 있는 것이 어릿어릿 보인다.

연못을 끼고 노랗고 키 작은 국화가 한 웅큼 피어있다.

그 옆으로는 시들어 마른 풀꽃들의 흔적이 땅에 납작 붙어있고,

키 큰 나무엔 짚단으로 옷을 입혀놓았다.

굽어진 소나무만 초록 아니 초록의 색을 담고 있을 뿐이다.

겨울의 갈색들은 색이 아니라 무채색으로 보인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무채색인 음력 11월 말 즈음 아주 찬 날이다.

 

이른 겨울 찬 기운에 국화꽃잎이 얼었다.

아직 방에 앉아있던 따슨 기운이 남은 몸을 국화옆에 바싹 대어본다.

국화꽃잎이 얼면서 향기도 같이 얼었다.

꽃잎 하나 따서 입에 넣는다.

쌉쌀하니 쓴 것이 삼켜지지 않고 입안 여기저기를 돌고 있다.

입안 여기저기 움직일 때마다 입 안에서 녹은 꽃화꽃잎은 향을 낸다.

쌉쌀하니 쓴 맛을 내며 내 안에 머무른다.

살짝 씹어 삼킨다.

넘어가는 기운은 없지만, 향이 온 몸으로 스며든 듯 코로 향이 난다.

내 속에서 풍겨나와 코로 빠져나오는 향이 달다.

 

우린 닮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생명을 가진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고.

닮고 싶은 것이 항상 똑 같지 않다.

 

언제, 어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닮고 싶은 것이 정해진다.

딱 그것이 닮고 싶은 것.

난 황국을 닮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방금 상상한 곳에 있는 딱 그 황국을 닮고 싶은 것이다.

 

황국 하나만 도드라지게 이쁘고 잘 난 것이 아니라.

옆에 함께 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배경이 되고 있는 황국, 그 황국이 닮고 싶은 것이다.

 

어느 봄날엔

이 황국도 몸을 숨키고 땅 속으로 들어감으로 봄꽃들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그런 공간 속에 살고 있는 그 황국을 닮고 싶은 것이다.

내가 닮고 싶은 황국은 어우러진 황국이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읊은 황국.

아마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모습, 봄꽃들 사이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

그런 자신의 자존감을 스스로 북돋아주고 싶어하는 맘이 느껴진다.

 

황국을 보면서 씹으면서 그렇게 자신의 길을 단단히 밟고 싶은 맘이었을 것이다.

맘이 흔들릴 때면, 혼자 가기가 힘에 붙일 때면, 지팡이 짚고 황국에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분의 의지나 생각이 아무리 확고하다하더라도,

그 분도 어쩔 수 없이 봄꽃들 가득 피우고 박수치는 세상에 몸을 붙이고 사셨던 분이였을테니까....

 

같은 국화를 놓고, 다른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닮고 싶다는 것은 그렇게 다른 것이다.

함께 하고 싶다는 것도 그렇게 다른 것이다.

 

누구와 누구가 함께 하고 싶다면,

-혹 지금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깨진 맹세'라는 조쉬 글로반의 노래처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그와 떠나버린 그녀... 원하는 것이 다르듯.

 

함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엇을 함께 하고 싶은 지를 생각한다면,

서로 닮아가며, 함께 하는 시간이 더 길지 않을까 한다.

 

너무 다른 시 읽기.

오늘은 화담 서경덕 선생님의 '국화를 읊는다'라는 시를 읽으며,

지금이 국화가 없는 계절이라 더 국화를 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다.

 

닮고 싶은 것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 분과 내가 가지는 황국에 대한 생각이 다르지만,

지금 이 순간 황국 한 잎 따다 잎에 넣고 싶은 것은 같은 맘이다.

그 환하면서도 무거운 향을 지닌 황국을 내 속으로 들이고 싶다.

그 맘도 같은 맘이다.

 

아주 오래 내 속에 머무를 것 같은 황국,

그것을 삼키면 쌉쓰름 쓴 향과 더불어 얼음 낀 연못있는 마당이 내 안으로 같이 끌려 들어올 것이다.

 

닮고 싶은, 그리운, 함께 하고픈 것은 사람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