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장석남] 새의 자취

발비(發飛) 2006. 1. 21. 21:44

새의 자취

-故 김소진 兄 생각

 

장석남

 

나는 오늘

봄 나무들 아래를 지나왔다

푸르고 생기에 찬 햇잎사귀들 사이로

바람은 천년의 기억 속을 들락거리고

나는 그 곳을 지나

집으로 왔다

 

저녁 내내 나는

창문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책꽂이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먼 곳에

누군가를 떼어놓고 온 양 나는

그런 일도 없으면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지면서

나는 왠지

내가 지나온 그 나무들 위에

바람만이, 햇살들만이 그 새살 같은 잎들을

흔들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속에

새가 한 마리 오랫동안

오랫동안

내가 그 곳을 지나치는 동안에도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울음없이

울음없이 젖은 눈을 굴리면서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명치를 적셔온다

 

새는 자기가 깃들였던 자리를 찾았던 것일지

새는

새는

그 찬란한 이파리들을

자기가 기르던 새끼들의

온갖 눈빛들이라고 생각하며

앉아 있었던 것일지

 

바람 한번 지나면

온 찬란함이

아이 울음으로 뒤바뀌는

폭풍 같은 고요를

삼키는 나무

밑을

나는 지나온 것이다

 

未忘으로 길어지는

나무 그림자를

푸드덕 빠져 나가는 새

새는 날아갔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새

 

未明이 가깝도록 나는 그 언저리를

작은 숨결들과 함께

서성이고 있다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 논어 팔일편 제20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경(詩經)의 관저편(關雎篇)에서는 시는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뜬금없이 논어이야기를 한다.

 

장석남시인의 새의 자취를 읽었다. 아니 노래했다.

아니, 처음에는 읽었고 다음에는 노래했다.

 

이 시를 처음 접하고 그저 활자를 언제나와 같이 속으로 눈으로 따라 읽었다.

눈으로 읽히는 시가 있고, 눈으로 읽히지 않는 시가 있다.

몇 번을 눈으로 읽었지만, 내게 가슴으로 오지 않았다.

 

모든 소리들을 죽였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읽어보았다.

시가 노래임을 운문임을 느끼게 해준다.

현대의 시들이 운을 잃어버리고 생각이나 관념으로 시의 모습을 취한다고 한다.

그것이 운문과 산문의 마지노선에 와 닿아있다는 느낌이다.

이 시를 소리내어 읽으면서 시를 노래한다는 말

음을 가지지 않으면서 운을 가지고 의미를 가지고도 노래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5번을 소리내어 읽었다.

 

내 안에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지고,

그 나무에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가늘게 흔들리고, 그 아래를 내가 지나간다.

새한마리가 날아간다.

언제부터 있었던지, 매일 지나다니던 길에 바람은 매일 불었었다.

그 바람이 그저 바람인 줄 알았지  새 한 마리 그 안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날아가는 새를 보면서

그랬구나 그 자리에 새가 앉아있었구나.

그 새가 나뭇잎을 키우고 바람을 일으키고 내가 지나는 것을 보고 있었구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그 빈 자리를 본다.

자리가 비었지만, 그 자리는 새의 자리로 남아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새를 보게 된다.

 

시 안에서 새의 빈자리를 보았다.

 

哀而不傷 슬픈 시임에도 맘을 다치지 않는다. 슬프면서도 아프지 않은 것.

哀而不悲 슬프면서도 비통하지는 않다.

 

부정적인 슬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을 위로해주는 아픔이 담긴 시이다.

그저 이 시를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哀而不傷  哀而不悲

 

장석남시인의 '새의 자취'는 나에게 슬퍼서 목이 뻣뻣해지게 하면서도 나를 행복하게도 했다.

 

날아가 버린 새처럼

자취를 남겨놓은 새처럼

......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