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서정춘] 귀

발비(發飛) 2005. 10. 22. 11:36
LONG

아름다운 독선

 

그러니까,

나의 아름다운 봄밤은 저수지가 말한다

좀생이 잔별들이 저수지로 내려와

물 뜨는 소리에 귀를 적셔보는 일

그 다음은, 별비체 홀린 듯 홀린 듯

물뱀 한 마리가 물금 치고 줄금 치고

1행시 한 줄처럼 나그네길 가는 것

저것이, 몸이 구불구불 징한 것이 저렇게

날금 같은 직선을 만든다는 생각

그래서는  물금물금 직선만 아직 내 것이라는 것

오 내 새끼, 아름다운 직선은 독선의 뱀새끼라는 것

 

종소리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가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수평선을 보며

 

그렇다, 하늘은 늘푸른 폐허였고

나는 하늘 아래 밑줄만 그읏고 살았다

 

마치, 누군가의 가난만은

하늘과 평등했음을 기념하듯이.

 

깃발

 

오직,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그것 아니다. 모든 날개 있는 것들은 애써 자기의 깃털로 바람을 만들고 스스로 깃발이 되어 허공을 트고 사라질뿐!

 

꽃신

 

어느 길 잃은 어린 여자 아이가

한 손의 손가락에

꽃신발 한 짝만을 걸쳐서 들고

걸어서 맨발로 울고는 가고

나는 그 아이 뒤 곁에서

제자리 걸음을 걸었읍니다

전생 같은 수수년 저 오랜 전에

서럽게 떠나버린 그녀일까고

그녀일까고

 

물 좋은 날

-임강빈 시인

 

공짜배기 물 보시 좋아라

지장암 우물물의 물잔에 비친

하늘빛 우러르니 청빈에 물들겠고

구름낀 하능르이 남루도 좋아

물 한 잔 비운 뒤 이만큼에서

 

들림

 

어디서 유리창이 깨지고 있다.

 

어느 피 한 방울 없는 파도의 혁명이냐

 

낮달을 헹구다

 

올라라

홀어미

설거지에

씻긴

시렁 위에

올라라

백자 접시의

홀어미의

올라라

 

 

ARTICLE

시집 [귀]

 

가을이라 그런지 갑자기 서정시들이 참 좋다.

한마디로 청승을 떠는 시들이 가슴을 울린다.

이 가을 서정시 한 권을 두드려보기로 한다.

 

서정시의 특징은 짧다.

 

그리고 긴 여운이 있다.

 

 

 

시인의 말

 

시, 열 여자를 만나면

시, 아홉 여자가 나를 버렸다

시, 한 여자도 곧 나를 버릴 것이다

 

-2005년 8월 서정춘

 

머릿말부터 죽음이다.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묘비명

-갈대

 

나는 늙으려 세상에 왔으나

이미 천년 전에 죽었다네

하늘 아래 서서 우는 미이라를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