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겨듣는 曰(왈)

그가 말했다.3

발비(發飛) 2005. 9. 10. 11:44

그가 말했다.

 

"다시 봄인가?"

 

그를 처음 보았던 날,

어느 사무실에 서류를 전해줄 것이 있었다.

서류 제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커먼 얼굴, 깡마른 몸, 길고 찐득해보이는 머리칼, 검은 수염!!! 그다.

영락없이 딱 그런 사람이다.

그가 나더러 말을 건다.

 

"이 사무실 다니세요?"

"네"

"사장님은 안녕하신가요?"

"네"

"언제 한 번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네"

 

하지만, 그가 누군지 뭘하는 사람인지 난 물어보지도 않고 나왔다.

사장님께 이러 이러하게 생긴 이상한 사람이 사장님을 알던데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런 놈이 한 둘이냐?"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한 달 쯤 후 그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딱 그 모습으로 , 거기다 땀냄새 짙게 풍기며....

그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 더는 말하지 말아야지. 말의 꼬리를 잡히지 말아야지...'

 

그리고 또 몇 달 후 다시 그가 나타났다.

그가 아닌 줄 알았다.

하얀 얼굴에 말끔히 면도를 하고 옅은 색 남방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

"..."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내가 생각해도 대접이 다르다.  身言書判이라더니... 모습이 다르니 나가는 말이 달라졌다.

그리고 사장님과 그와 내가 밥을 같이 먹었다.

 

"인상이 좋으세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럴리가 없는데, 내가 인상이 좋을리가.. 말도 안 된다.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아는군!

술을 끊었다고 했다

그리고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좀 다르게 살아볼 생각이라 했다.

물론 이런 말들은 사장님께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말 옆에서 술을 마시는데도 마시지 않고 웃기만 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긴머리와 수염이 웃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났다

더욱 하얘진 모습으로, 더욱 깨끗한 남방을 입고 다시 계절이 바뀌어 나타났다.

 

"와~, 왜 이렇게 많이 변하셨어요? 완전 다른 사람같애요."

 

그가 하는 말이다.

 

"다시 봄인가?"

 

그에게 봄이 왔나보다.

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인가 보구나.

처음 그를 봤을 때 그의 모습과 그의 말대로 봄은 너무나 달랐다.

그 시간 안에 있었을, 그의 마음 속의 전쟁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온 몸으로 치렀을 그의 전쟁에서 어쨌든 그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보였다.

평화가 보이기 시작한 그를 만나고 나서 기분이 좋았다

그가 부탁한 일을 난 출근하자 말자 기분 좋게 처리한다.

 

봄을 만난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봄을 즐기고,

여름을 맞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름을 즐긴 다음 여유롭게 가을과 겨울을 맞아

그가 원하는 다른 생에 갈 즈음에

처연히 자신의 잎들을 떨어뜨리며 그렇게 다른 생으로 가길 바란다.

 

얼마 전 그는 누구나 한 번쯤 가야 할 그 곳을

너무도 가고 싶어했으니까, 지금도 가고 싶을 것이고,

가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테니까...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때까지

그가 봄, 여름, 가을 , 겨울을 충분히 느끼며 살아가길 빌어본다.

 

어제 그를 만났다.

오늘 다시 그를 생각하며 빌어본다.

 

참 다행이다.

그가 그렇게 말해서 참 다행이다.

 

"다시 봄인가?"

 

에너지가 전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