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힘 받을 시간이 필요하다

발비(發飛) 2005. 7. 9. 10:26

하드양장본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시간이 걸린다.

 

정합. 접지라인을 거쳐, 중철 또는 사철을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것은 하드양장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이 중철 사철부분이다.

견고함, 그리고 고급스러움

강인함. 그리고 우아함.

사철과 중철에서 풍겨지는 귀족스러움이 좋다.

 

끝나고 나면, 본드칠을 한다. 확인사살인 셈이다.

이때 부속물들이 들어간다.

그러면 이제 기다림의 시작이다.

본드를 붙인 후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책들을 가지런히 재어 놓아야 한다.

서로의 힘에 의해 서로가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되도록이면 무게를 실어주어야 한다.

아주 오래도록... 오래 눌려있을수록 책은 더 튼튼해진다.

 

하드카바를 씌운다.

풀칠을 해서 씌운다. 하드카바는 합지에 종이나 포크로스를 씌우는 것인데,

이 작업도 끝난 뒤에는 기다려야 한다.

잘 재어두고 기다려야 한다. 서로의 몸에 서로을 밀착시킬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시간을 주어야만 그들이 완전 밀착될 수 있다.

 

만약 이 기다림이 못 견디면, 책은 튼튼하지 못하다.

미숙아처럼 항상 골골거리게 된다.

출판사에서 너무 급하게 책을 주문하거나,

제본소에서 신경을 늦추면  무늬만 하드양장인 책이 나오는 것이다.

무조건 빨리 빨리 하는 것 , 하드 양장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기다림이다.

고급스러운 물건일 수록 기다림이 필요하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오래된 건축물도 기다렸을 것이고,

전라도 어디의 묵은지도 기다렸을 것이고

깊은 계곡도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내가 무선철제본... 그 인스턴트가 되기 싫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때론 무선철제본이 필요하기도 하다.

전철에서 읽는 범우문고 2500짜리 시리즈나 리더스다이제스트 같은 얇은 잡지는

무선제본철이 좋기는 하다.

하지만 나의 삶이 전철에서 읽는 범우문고나 리더스다이제스트 같은 것은 싫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처리가 싫다.

한 번 내지 두 번 읽고나서 어딘가에 굴러다녀도 찾게 되지 않는 그런 삶은 정말 싫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다리고 기다려서 만나는 사람이고 싶고,

오랜 기다림이 나를 혹은 친구를 튼튼하게 만들어 진정한 하드양장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드 양장에 어울릴만한 좋은 줄거리를 가진 활자가 가득 담긴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느 고서가에 꽂힌 하드양장본일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만들어진 하드양장본이 되어, 다른 하드양장본들 사이에 꽂혀

두꺼운 커버 너머로 친구들의 삶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 체온으로 느껴보기도 하고

그렇게 비슷한 것들과 함께 하고 싶다.

지나친 욕심이고 사치일까?

 

서점에 가면, 하드양장본이 넘친다.

하드양장본의 가벼움들......

이젠 너무 흔해서 하드양장본의 귀함도 모르는 요즈음...

난 기다려서 무거워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무거워지는, 스스로 무게를 늘이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하드양장본을 꿈꾼다..

 

비가 내리는데, 하드양장본들은 단 하루을 재어있다가 나간다.

비가 내리면, 아무래도 본드는 천천히 마르는데, 그래도 하루만 재어있다가 나간단다.

설익은 그들이 잘 견딜 수 있을까?

서로가 낙장이 되지 않게 잘 붙들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