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김사인] 겨울 군하리

발비(發飛) 2005. 6. 13. 18:04

겨울 군하리


김사인


쓰다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있다

쓰다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몹시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주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 개들이를 안고 네걸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이 시가 좋아서 두드린 것은 아니다.

그냥 버려진 것들에 대한 시선이, 그런 시선이 안타깝다.

사방에 버려진 것들,

내가 버린 것들과 같은 것이다.

아마 내가 버린 것일 것이다.

지천으로 내가 버린 것들은 깔려있고, 사람들은 내가 버린 것들을 밟고 지나간다.

내가 버린 것들 사이로 지나가는 처량한 인생들,

버린 것들 사이로 지나다니는 인생들은 결국 라면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다.

버려진 것들이 잔뜩 있는 사이로, 체어맨이 지나가지도 않을 것이고, 최고급 안심스테이크를 들고가는 이도 없을 것이다.

내가 버려 놓은 것들 사이로 처량한 인생이 지나간다.쓰레기때문에...

순창고추장과 까만 봉지와 스티로폴..

오늘도 난 그것들을 버리고 왔다.

그 옆을 처량맞은 인생하나가 지나가겠지.

돌아서 가라...

멀리 멀리 돌아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