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제2부

발비(發飛) 2005. 5. 15. 14:45
LONG

 

 

52. 벌레 먹힌 꽃나무에게
 
 
나도 너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발가락이 튀어나온 양말 한구석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다
 
아, 너도 나에게 해줄 말이 있었을 것이다
양말 한 구석에 튀어나온 발가락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53. 잔치 여느라 정신이 없는
 
 
피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다가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늦도록 찌짐을 붙이고
단술을 빚는 여인들에게
잔치는 고역이었으니,
 
 
잔치 끝나면 한 보름
호되게 앓아 눕는 여인네처럼
 
한창 잔치를 여느라 정신이 없는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나는 했다
 
 
54. 너는 잘 잔다
 
 
참으로 고운 것들은
고운 데 미친 것들이다
 
밤의 속눈썹에
이름 없는 꽃들이 매달려도
 
너는 잘 잔다
너는, 너는 잘도 잔다
 
 
 
 
55. 자꾸 미안하기만 해서
 
 
세상에 교비하려고
몸단장하는 것들
부끄러움도 많아서,
따지고 보면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어 보낸 건데,
신혼여행 갓 돌아온
어린 딸처럼
꽃은 나무 보기 쑥스러워서
자꾸 미안하기만 해서.
 
 
56. 푸른 치마 벗어 깔고
 
 
이제 곧 창검처럼 솟은 가시들
사이로 사뿐사뿐 흰 꽃들'
술래잡기하다가
지쳐 다리 뻗고 쉬려고 할 거야
잎새들 그 밑에다
푸른 치마 벗어 깔고
꽃들이 떵어질까 애태울 거야
하비만 쉽게 당하지만
않을 거야, 너무 가벼워
가시에 찔리지 않을 흰 꽃들
 
 
 
57. 날마다 상여도 없이
 
 
저놈의 꽃들 또 피었네
먼저 핀 꽃들 지기 시작하네
나는 피는 꽃 안 보려고
해 뜨기 전에 집 나가고,
해지기 전에 안 돌아오는데,
나는 죽는 꼴 보기 싫어
개도 금붕어도 안 키우는데,
나는 활짝 핀 저 꽃들 싫어
저 꽃들 지는 꼴 정말 못 보겠네
날마다 부고도 없이 떠나는 꽃들
날마다 상여도 없이 떠나가는 꽃들
 
 
 
58. 귓속의 환청같이
 
 
꽃이 진다
신경증적 야심도 없이
꽃이 진다
서럽다고 하지 마라
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꽃이 진다
뀌속의 환청같이 꽃이 진다
쭈그러진 귓바퀴같이 꽃이 진다고
과장하지 마라
지는 꽃이 맥반석 위에 타들어가는
마른 오징어 같다고
착각하지 마라
넌 분명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59. 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 블록에서
낮은 신음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60. 하지만 뭐란 말인가
 
 
한 잎의 결손도 없이
봄은 꽃들을
다 불러들인다
해 지면 꽃들의
불안까지도
 
하지만 뭐란 말인가
저렇게 떨어지고 밟혀
변색하는 꽃들을
등불처럼 매달았던
봄의 악취미는?
 
 
61. 새 이야기
 
 
재금 새의 발끝에서 오리나무 가지가
알아듣는 이야기, 오라비의 손이 놓인
누이의 어깨처럼 오리나무 가지가 느끼는
이야기, 오리나무 혼자서 견디는 이야기
 
 
 
 
62. 백랍같은 영혼이 있다는 듯
 
 
 
현사시나무가 줄지어 선 곳에서
간밤 나무들의 꿈을 알 것 같다
 
백랍같은 영혼이 있다는 듯
목이 긴 새들이 줄지어 날아갔다
 
날아가는 새들의 쭉 뻗친 다리가
침 맞은 것처럼 경련했다
 
오늘 밤 꿈속으로 새들이 돌아오면
나도 현사시나무의 흰몸을 받으리라
 
 
 
63. 밤에는 학이 날았다
 
 
많은 것들이 울고 가고,
더 많은 것들이 울고 가고
밤에는 학이 날았다
 
쭉 뻗은
젓가락 같은 다리가
도 한 번 경련했다
 
날으는 학이
달을 꿰뚫을 수 없듯이
그대 슬픔은 따지 못할 과일이었다
 
 
64. 밀려오면서 고운 모래를
 
 
물이 밀려온다
밀려오면서,
고운 모래를 뒤집어 놓는다
 
물새들은 어째서
같은 방향만 바라볼까
죽은 물새들을 추억하는 자세가 저런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서럽지도 않은 것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65.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그리움은 몸이 없어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기만 한다
 
눈이 쌓인다
몸은 그리움을 몰라
눈이 쌓인다
 
눈은 쌓이기만 한다
 
 
 
66. 아니라면 할 수 없고
 
 
어디 눈떠볼래? 눈떠봐.
눈은 오리나무 마른 잎새를 흔든다
 
나도 가고 싶어. 난 가면 안돼?
솟구치는 까치 날개에 스쳐 눈이 떨어진다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라면 할 수 없고,
내 귓밥에 앉은 눈은 풀이 죽었다
 
 
 
67. 무엇 하러 마다 않느냐고
 
 
어디 덮어줄 데가 없나,
들판에 매어놓은 헐은
소 잔등위에 내리던 눈은
시멘트 기둥을 아이처럼
업은 포도나무에도 내렸다
 
해마다 그 미친 노역을
무엇하러 마다 않느냐고,
해마다 왜 내리는지
저도 모르는 눈은 늙은
포도나무만 나무랐다
 
 
 
68. 측백나무 잎새 위에 오는 눈
 
 
몸 위에 내려
몸을 숨겨주는 것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며시 팔을 빼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엄마처럼
 
몸은 잠시 사라졌다
돌아오는 것
 
 
 
69. 시집간 우리 누이들처럼
 
 
눈은 내리면서
제 빛깔과 소리를 얻는다
서로 다른 동네로
시집간 우리 누이들처럼
 
눈은 녹으면서
제 친정으로 간다
족두리도, 신발도 없이
길 없는 길을 돌아가는것이다
 
 
70. 슬퍼할 수 없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71. 차라리 댓잎이라면
 
 
형은 바다에
눈 오는 거 본 적 잇수?
 
저리 넓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 앉을 데 없다니
차라리 댓잎이라면 떠돌기라도 하지
 
형, 백 년 뒤 미친 척하고
한번  와 볼까요
백 년 전 형은 또 어디 있었수?
 
백 년 전 바다에
백 년 뒤 비가 오고 있었다, 젖은
그의 눈에 내리다 마는 나는 빗줄기였다
 
 
 
72. 목이 안 보이는, 목이 없는
 
 
바람의 판 유리 깔아놓은 서해,
저 무대까리, 목이 안 보이는
아예 목이 없는 바다
아무것도 껴안을 수 없어
안기기만 바라는 바다
마냥 소리쳐도 말이 안되는 바다
마냥 부대껴도 춤이 안되는 바다
 
 
 
73. 서해 바다 어둡다
 
 
서해 바다 어둡다
어떤 영혼도 밤처럼 어둡다
지아비의 손을
부푼배로 가져가는 바다
밤아, 오늘 밤 만조는
어느 불행한 아이의 수태 고지인가
언젠가 바다는
내게 월경 주기를 알려주었지만
내 아이는 아니다
흐르는 내 흰 피는 뱀이 마셨다
서해 바다 어둡다
어떤 어두운 영혼도 내통한 것이다
 
 
 
 
74.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 바다의 목구멍을
볼 수가 없구나 박명의 해가 도장 찍는
헐어빠진 바다의 몸에 흰 고름 같은 물결,
차갑게 식는 바다에 몸이 고이 다가오는
밤은 결 고운 안동포 수의를 입히는구나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구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76.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찰랑이는 채석강 연안 바닷물이
쨍알쨍알 보채는 나를 달랜다
목까지, 눈까지 잠겨 작은 물결
물새떼 흉내를 내는지 물새떼
작은 물결 흉내를 내는지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마냥 발길
떨어지지 않는 나를 달래며 바다는
속이 탄다 검은 오지 항아리 속
자글자글 끓는 바다는 나를 달랜다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오늘도 난 바다에게 짐만 되었다
 
 
 
77. 오래전 신랑인 바람이
 
 
바다는 푸른 나일론 치마를
펼쳐놓은 듯 가볍게 떠 있었다
그 안에 어던 무거운 몸이 쉬고
있었지만, 그 숨결 하도 가지런해
아무도 들어 있지 않은 홑이불 같았다
깊어가는 바다의 잠이 한순간
물새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가
급히 날아오르는 새떼들 날갯짓에
깨어난 바다는 어지러움에 몸 가눌
수 없는 임산부처럼 약간의 신열과
구토를 맛보았지만, 그래도 산모의
기미 낀 얼굴 같은 수면 위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웃음이 있었다 거의
피로와 잔주름으로 이루어진 미소,
오래전 신랑인 바람이 다녀간
뒤로, 환하게 바다가 머금은......
 
 
 
78. 지금 우리가 떠나도
 
 
내포에 들어와서 물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안다 넓은 양푼
위에 찍힌 징의 자극 같은 상처를
펼쳤다 거두면서 그래도 아직 할
일은 남아 있다는 듯, 종일 하늘빛
빨아들이던 물은 이제 그 하늘 빛
게워내고 있다 한참 젖을 빨다가
토악질도 않고 올녀내는 아이처럼
아, 오래 바라보면 바다엔 표정이
없다 지문이 문드러진 늙은 손처럼
지금 우리가 떠나도 명멸하는 빛이
남느나는 건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79. 술지게미 거르는 삼각 받침대처럼
 
 
저 배흘림의 선을 얻기 위해
산들은 얼마나 귀 기울렸을까
요절 할 수 없는 것들이 만드는 서느
불터 사그라져 재가 되어 얻는 선
술 지게미 거르는 삼각 받침대처럼
저들의 어깨는 다른 어깨를 받기 위한 것
저들의 울음은 다른 울음으로 흘러내려가는 것
 
 
80. 죽어가며 입가에 묻은 피를
 
 
비 오는 날 우산 받쳐 들고 산에 오르며
산은 흘러내리는 빗물을 제 혀로 핥고 있다
그리움이나 슬픔 그런 빗나간 느낌도 없이
산은 괴로움에 허리 적시며 젖고 있다
죽어가며 입가에 묻은 피를 제 혓바닥으로
핥는 짐승처럼, 그 산 내려오다 뒤돌아보면
산은 제 괴로움에 황홀히 피어나고 있다
오직 스스로를 항복받지 못했기에,
세세 영원토록 제 괴로움 홀로 누리는 산
 
 
 
81.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그 뿔과 갑주의 등허리에 흰 눈 뒤집어쓰고
산은 쓰러져 있다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산, 제 굶주림과 성과 광기를
제힘으로 못 이겨 헐떡거리는 산, 홀연히
눈보라 치면, 꼭대기 레이더 기지 첨탑은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더 깊이 후벼팠다
 
 
 
82. 그 흉터 그대로 생일 옷  꺼내 입고
 
 
그 산은 우리 광대뼈 위에 있다
모로 째진 눈과 비쩍 마른 몸매의
그 산은 외몽고에서 쏭화강 넘어왔다
그 산을 깎은 것은 비바람 번개만은
아니었다 군화발과 최루탄 페퍼포그가
그 산의 이마에 문어포를 떴다 향로
머리에 인 그 산의 봉우리마다 노을진
하늘은 상다리 부러지는 제사상이다
거기 꺼멓게 그을린 팔과 오래 물에 잠겨
퉁퉁 불으 얼굴들 켜켜이 쌓여 그 몸 스스로
기억인 산, 그 속 통째로 통곡인 산, 전신에
신나 끼얹고 불타지 않는 산, 전신에 신나 끼얹고도
흉터만 챙기는 산, 그 슝터 그대로 칠보 문신인 산
보라, 그 흉터 그대로 생일 옷 꺼내 입고
천년 누비에 눈시울 적시는 산, 천년 눈비에
어질머리 누벼, 주빈 옷 걸쳐입고 번쩍
햇살 그네 올라타는 산, 햇살 그네 한껏 당겨
날아오르는 산, 제 입으로 토한 실 먼먼 하늘에 걸고
순식간에 몸을 날려 활강하는 산, 푸르른 형벌 속에
다시 뛰어드는 산, 푸르른 형벌 그대로 단풍 드는 산,
아, 얼마나 많은 가시 네 가슴을 할퀴고
얼마나 많은 못 네 어깨에 박혀야
둥근 빛 덩어리, 빛의 소용돌이 어둔 밤을 찢을까!
그 산은 아직 우리 광대뼈 위에 있디
움푹 꺼진 눈꺼풀 아래 오래 잠 못 드는 산
 
 
 
ARTICLE

 

 

 

작품량이 다른 시집의 배는 되는 듯 싶다. 그의 정열을 엿볼 수 있다.

한 편 한 편 두드리는 맛이 좋아... 시집 한 권을 다 두드려보자고 생각했다.

 

 

제2부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49. 무언가 아름다운 것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 눈으로 잠 한 숨 못 자고

 

아침엔 손을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무언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어요

 

 

 

50. 더 먼 곳에서 다쳐

 

 

저녁이면 꽃들이 누워 있었어요

이마에 붉은 칠을 하고요

 

넘어져 다쳤는지 몰라요

어쩌면 더 먼 곳에서 다쳐

이 곳까지 와서 쓰러졌는지도

 

엎드리면 꽃들의 울음소리 들렸어요

난 꽃들이 등물 하는 줄 알았어요

 

 

 

51. 아, 입이 없는 것들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