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가을 그리고 초겨울. 1 - 선 긋기(보태니컬아트)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어제 들고 다녔던 가방 속의 짐들을 베란다 박스안에다 얹히는대로 얹었다.
스케치북, 색연필, 제도빗자루, 연필깎기, 지우개 그런 것들이다.
늦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때쯤 평생교육원 강좌로 신청했던 보태니컬 아트, 그게 뭔지도 모르고 식물을 그린다니 좋겠다 싶었다. 세밀화였다.
두번째 수업에서 포기하려고 했다.
사진과 똑같이 그려야 하는 것, 이걸 왜 그리지? 찍으면 되지? 똑같이 그린다는 것에 대한 현타가 왔다.
내 생각 따위는 의미가 없이 그저 대상만을 끊임없이 보고, 똑같이 그려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 방면에 소질이 없었다. 다만 아이패드로 내 생각대로 마치 글을 쓰듯 마구 그려놓고 나서 내 정신상태, 마음상태를 확인하는 낙서같은 그림을 그렸을 뿐, 고전적인 의미의 그림에 아예 근접도 못했다.
선 하나 하나 그을 때마다 곧지도 않을 뿐더러, 연필을 잡은 손의 떨림조차 콘트롤이 되지 못하는 상태였던 지라 매 순간 자괴감과 열등감에 빠져야 했다.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평온하고 자족하고 싶었는데,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세번째 시간을 끝내고 나오면서 늘 옆자리에 앉던 짞꿍에게 다음주부터 안 나올 수도 있다며, 안 보이면 간 줄 알라고 하면서 혹시 모를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다.
기분이 안 좋았다.
하려다 그만 둔다는 것이.
애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못한다는 것이.
그런 것들이 아직도 내 곁에서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날도 가방을 베란다에 던져두고, 두 어시간.
가방에서 연필과 지우개와 스케치북을 꺼내 집에 있는 시간 내내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설강화를 그렸다.
구를 그리는데, 2주가 걸렸고, 설강화를 그릴 차례인데, 연필 끝이 제 멋대로 그어져 엉망진창이었다.
설강화를 지우고 그리고 두 장을 그리고나서야 형태가 어느 정도 잡혔다. 손 떨림도 나아졌다.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던 짝꿍은 내 작별이 대수롭지 않았던지, 큰 결심과 각오로 한 주를 보내고 온 나에 대해 어떤 말도 없었다. 지난 주와 똑같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오고, 내 그림과 본인의 그림을 보며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선긋기.
세밀화는 지독한 선긋기이다. 연필의 끝이 조금이라도 무뎌지면 뾰족하게 연필을 깎아 가장 가는 선을 그어 면을 만든다.
꽃잎 하나에 몇 시간씩 걸릴 때도 있었다.
이제 몸에 선긋기가 좀 익숙해졌고, 재미있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선긋기'라고 하면 구분을 생각한다.
선을 그어야지.
너와 선을 그어야지.
지난 날과 선을 그어야지.
선을 분명히 해야지.
선 넘지 마.
가느다란 선을 수없이 그으면서 선을 긋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긋고 있는 선들은 곡선이다.
그동안 수없이 그었던 선들은 경직되고 움직일 수 없으며 단호해서 돌이킬 수 없었던 직선이었다.
날카로워서 너 혹은 내가 찔릴 수 밖에 없었던 양쪽 끝이 뾰족한 선들, 조금의 흔들림이 용납되지 않는 곧은 선들,
꽃에는 그런 선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에는 그런 선이 없었다.
곡선 안에서 깊은 곳과 낮은 곳, 밝은 곳과 어두운 곳, 넓은 곳과 좁은 곳, 무엇보다 어찌해 볼 수 있는 여유공간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만들어 둔 면, 면이 아니라 공간이 생긴 거다. 앞도 뒤도 생긴거다. 당
지금 생각으로는 당분간 이 그림들은 그리지 않을 것 같다.
도서관에도 가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아이패드로 휘리릭 색 채우기도 하고 싶다.
무엇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작가의 책들을 다시 읽고 싶다.
한강작가가 스웨덴에서 말한 그 관점으로 그의 책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심사평으로 말한 그 관점으로도,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오늘은 안동으로 이사온 지 딱 한달 되는 날이다.
올해가 보름이 남았다. 내년 꼭 '운동하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지난 가을을 잘 보냈으니, 내년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