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아버지訃告] 황성옛터

발비(發飛) 2017. 12. 12. 02:07

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아버지와 나는 황성옛터를 불렀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한달 남짓이 지났을 뿐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산소호흡기를 끼기 전이었는지,끼고 나서 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 엄마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동생이 곁에 있었는지, 아닌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조카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아무튼 늦은 밤이었고, 

아버지와 내가 멀뚱하게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었더랬다.

아버지는 아프고 힘들어서 연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크게 숨을 쉬었다가, 

손을 가슴에 두드렸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노래 부를까?"


나는 황성옛터의 음원을 찾아서 틀었다. 

아버지는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잠시 치더니, 

금방 입을 벙긋거리며 노래를 했다. 



-잠시 딴 소리-


우리 가족은 모두 음치에 가깝다. 

그런데 필은 모두 가수 저리 가라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내가 초등학교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술을 드시고 오시거나, 

집으로 친구를 데리고 와 술을 드실 때면,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 

젓가락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아마 300곡은 넘게 아시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옛날 노래를 꽤 많이 안다. 

사의 찬미부터 돌아오라 소렌토로까지, 안개 낀 장충당공원도 알고, 제목은 뭔지 모르지만 부라보! 아빠의 청춘도 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잠이 들지 않은 우리 남매 중에 한 명을 깨워 춤을 추기도 하고, 

우리가 모두 자는 척하면, 키우던 강아지를 안고 춤추고 노래불렀다. 


나도 음치지만 노래하는 것과 듣는 것을 좋아하고

동생도 음치지만 그런 것 같다.




소리는 내가 내고, 아버지는 입을 겨우 벙긋거리며 소리가 나는지 안나는지, 

아버지는 점점 입을 크게 벌렸다. 

아득하게 웃는다. 

나는 잘한다고 칭찬해줬다.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아버지와 마주치고 있던 눈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황성옛터의 가사는, 내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소리내기가 힘들어졌다. 


왜 황성옛터를 골랐을까?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버지는 이 가사를 부를 때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나는 차마 민망해서 다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성이고,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세상이 허무한 것을 보여주고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러고보니, 동생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황성옛터'가 아니라 '아빠의 청춘'을 불렀을 것이다. 

동생은 아버지랑 함께 노래할 일이 있으면 꼭 '아빠의 청춘'을 불렀었는데, 

나도 그걸 부를 것 그랬다. 

그게 더 나은데,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청춘!


또 후회다.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군데는 부러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있고 

뿌리채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 순간 뼈아픈 후회를 하지 않으셨길 바란다. 


우리들을 잘 지켜주라는 엄마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오래도록 먼 곳에 혼자 둔 오빠를 잘 다독여주라는 엄마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고맙고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씀을 소리도 못내고 벙긋 하신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입술을 내밀어 입맞춤을 하신 것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어느 젊었을 때보다 황폐하게 사라져 갈 때 더 다정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그 모습이 그 순간 아버지의 생각이고, 아버지의 의지였길 바란다. 

 

저 시가 내게 또 뼈저리게 다가 왔지만,  

그래서 나는 오늘 밤 저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나의 남은 삶에 뼈 아픈 후회가 없기를 바란다고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얼굴도 보지 못한 할머니 '윤월림' 여사를 부르며 크게 울었던 것과 같이

나는 지금부터 앞으로 아버지를 부르며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을 만지며 울었던 것이 내 뼈아픈 울음의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아버지가 바랄 것이다. 


삶의 끝을 알고 있으니.

침착하게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