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아버지訃告] 일상

발비(發飛) 2017. 12. 1. 10:01



한 달 전에 누군가가 누군가를 소개 시켜준다고 했었다. 

어제는 첫 누군가가 전화가 와서 누군가를 오늘 만나겠냐고 했다. 


잠시 망설였다. 

내가 喪중인가? 그건 아니다. 형식적이지만 당일 脫喪을 했으니까. 

멈칫 하다가, "그러죠" 하고 대답을 했다. 


'일상을 살자.' 


그런 생각이 했다. 


그리고 퇴근 후 두 번째 누군가를 만났다. 

어색한 인사 뒤에, 간간이 이어지는 말.

그러다 어느 미국 영화 감독이 배우들을 성폭행했다는 뉴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몇 주전에 뉴스에 엄청 나온 내용이라며, 그는 의아해 했다. 


"아, 그즈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그 사람이 순간 당황하는 게 보였다. 

당황은 그 뉴스가 나온 지 2,3주 전이고,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얼마 안 되었는데,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것에 있었다. 


"일상을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 전에 한 약속인데,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 분주할 것 같아서요."


하고 대답했다. 


보는 이에 따라 좀 이상한 태도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넘어갔다. 


"닮고 싶은 죽음이었어요. 저도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말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내 마음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고자 하였지만,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슬픔을 늦게 느끼는 편이신가 봐요."

"네. 부재를 느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아..."

"돌아가신 지 보름 만에 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 생긴 오늘, 처음으로 보고 싶었어요."

"아... 그렇군요."


어찌어찌 자꾸 그 이야기가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난감했다. 


늘 나의 몸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은 각각 제멋대로다. 


"즐거웠습니다." 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식사가 괜찮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만약 오늘 나와 연루된 어떤 나쁜 사건이 벌어졌다면, 

나도 [이방인]의 '뫼르소'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지. 


"일상을 사는 거니까요."


나도 뫼르소처럼 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할 것이다. 


다만, 내가 누군가를 만나 맛난 저녁을 먹은 것으로 어떤 말도 안되는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죽음 혹은 슬픔의 언저리에 이미 내가 가 있어 그 상황이 새로운 국면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뫼르소의 고요함도 그래서이지 않았을까?


그런 어제를 보낸, 나는 오늘도 일상을 산다. 





새벽에 걸려온 전화 

-이문재 시인


"슬퍼서 전화했다. 가장 슬픈 일은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너는 어디 가지 말아라. 어디 가지 말고 종로 청진옥을 와라. 지금 와라."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