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시정 잡배의 사랑
책상 위에 놓인 것 중 읽을거리는 딱 시집 한 권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
나는 석연찮은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집을 훑어 읽는다.
시정 잡배의 사랑
허연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그런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은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나는 시정잡배였고, 시정잡배이다.
화내고, 용서하고, 울고, 웃고, 그리워하고... 어쩌면 영원히 쳇바퀴처럼 그럴 것이다.
술을 마시면 말이다.
나는 그렇게 찌질한 시정잡배이다.
시작은 이랬다.
sns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작해야만 했다.
준용이는 긴 여행 중이라며 자신의 sns를 가르쳐주었다.
그 여행에 동반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 그의 sns에 들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그 곳에서 뭘 보고 다니는지, 박수를 치며 응원을 하고 함께 설레인다.
그러다 화면 한 귀퉁이에 알만한 친구의 사진이 뜬 것 중 함께 일하던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나의 여행 중에 그 친구가 결혼을 했고, 내게 청첩은 하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결혼을 축하한다고, 한번 보자고 전화를 했다.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의 글들을 훑어 읽어가는 중
술만 마셨다 하면 자신의 인생사에서 역경의 순간이었던 장면들을 나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돌림노래처럼 했던 그시절 상사가 생각난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정말 행복한 사람은 정말 불행이 뭔지 아는 사람이며 그 두개가 동전 양면 같아 굳이 행복을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십대가 가까운 그는 그런 행복을 몰랐다. 그의 개똥철학을 들으며 내 개똥철학이 차라니 낫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순간, 뭔가 내 머리를 훅 치고 지나갔던 것은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난 이제 막 직장생활에 발을 들여놓았던 여섯살 어린 후배와 저녁을 먹으며 직장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것인지 개똥철학을 신나게 늘어놓았던 것이다. 후배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길,요상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걸 기억하면서 그 밤 상사의 개똥철학 또한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이었겠거니 생각하며 우스운 결말이지만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나는 '나'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산티아고를 걸으며,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수없이 했던 반성들.
그 때의 반성은 허연 시인의 말처럼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그랬다.
왜 그들이 이 길에서 아픔과 함께 떠오르는 것일까?
처음에는 관계에 대한 생각, 나중에는 나라는 그릇에 대한 생각, 뭐 이런 생각들로 엉키기만 하다가 뿌리칠 수 있는 한 뿌리친 시간이
뜨거운 태양아래서 계속 되었다.
그러다 왜 반성만하나, 분명 진심이었는데, 반성 좀 하지 말자! 그만하자!
그들이 떠오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개똥철학
안타깝게도 행복하게 살지도 못하면서 개똥철학으로 포장한 표리부동, 자리를 이용해 개똥철학을 펼친 시정잡배.
허연 시인의 시정잡배임이 분명하다.
세번 읽고, 네번 읽고 또 읽으려다가 허허하고 웃는다. 그리고
핑계를 찾는다.
그렇게 않고 그 자리를 버틸 수 있었나,
그 자리에서들어줘서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거라고,
안타깝게도 행복하지 않아 그렇게라도 개똥철학을 떠들만한 상대가 그들 밖에 없었다는 것을,
허허하고 자꾸 웃는다.
다시 직장생활 중이다.
나도 술자리에서 안타깝게도 행복하지 않은 누군가의 개똥철학을 들으며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마다 나의 개똥철학을 들었던 그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되도록이면, 이것도 함께 떠올리려 해 볼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내가 과거에 슬펐던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가 때문은 아닐까?
슬픔의 기억과 배고픔의 기억이 있는 한, 우리는 타인의 슬픔과 배고픔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서러움과 슬픔의 기억이야말로 우리들은 서로 연결해 주는 끈일지도 모른다.
나와 타인을 연결해 주는 끈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아픔을 되새김질하는 솔리튜드의 시간이다.
우리들의 내부에 풍부한 텍스트를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고 떠올리는 것.
허연시인의 시정잡배의 사랑, 나만 찌질하지 않아 참 다행이다.
미안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개똥철학을 떠들었던 그 시간을 나는 진심으로 그리워했다고 그 친구에게 말하고 싶다.
이젠 못할거니까, 앞으로도 그 시간이 그리울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