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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해피앤드] [하녀]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남동생] [동경가족]

발비(發飛) 2014. 9. 29. 16:51

 

일어나면, 옷을 입고, 나와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물을 마시는 등을 하는 게 정석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서 방향만 바꾸어 누웠다. 그리고 지난밤에 보다가 잠들어버린 영화를 다시 틀었다.

삶에 테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삶이 만들어 준 틀에 대한 테러, 반칙, 학교 담벼락을 넘어 겨우 떡볶이 몇 개를 사 먹을 때의 쾌감. 떡볶이가 아니라 일탈의 쾌락.. 쾌락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착하고 고요한 일본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奇跡, I Wish, 201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부부의 별거로 생이별을 하게 된 형제, 형은 엄마와 함께 매일 화산재가 날리는 화산 근처의 외가에서 살게 된다.

화산이 폭발하면 어쩔 수 없이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화산이 터지길 소망한다. 어느날 철로를 달리는 두 대의 고속철도가 스칠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각자의 소원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으는 등의 전략을 세운다.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지기 위해 아빠와 살고 있는 동생과 함께, 동생친구들도 함께.. 그들은 만난다. 두 대의 기차가 지나갈때... 소리친 소원, 형은 자신의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화산이 폭발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사회를 위한 선택을 한다. 동생 또한 가족이 함께 살라고 빌기보다 아빠가 성공하길 빈다. 

이야기가 영화가 되는데, 가져야 할 것은 장치이기 보다는 진정성이라는 생각이 보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두 아이를 둘러싼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어른들이지만, 근엄하거나 압도적이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것을 찾고 선택하였을 뿐이었다. 어른과 아이가 다르지 않은 영화.

다르지 않아도 된다.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뭐, 하며 나를 가만히 가만히 두었던 영화.

 

[잠시 딴 소리]

착한 영화를 보고, 고요한 마음이었다. 라이오를 틀었다. 박경림이 진행하는 [두시에 데이트]. 한 주에 영화배우 한 명의 특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주는 전도연이다. 패널과 박경림이 전도연에 대한 찬양이 한창이었다. 많이 언급되었던, 내가 보지 못한 영화면서 관심이 가는 영화 두 편, 둘 다 야한 영화다. 전도연이 야한 영화를 야하게 찍었구나... 그런 줄 몰랐다. 라디오를 끄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착한 아이의 영화 다음에 바로 이어서 본 영화.

 

해피 엔드
Happy End, 1999.  (정지우감독)

 

엄청 오래된 영화였다.  이때쯤 난 아마 전생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때 이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 난 흐음~거렸다. 인간의 욕망은 전도연의 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억울했던 최민식의 전업주부에도 있고, 억울하게 된 주진모에게도 있었다. 찌질함도 욕망을 포기못한 인간의 한면이라는, 욕망에 사로 잡힌 인간은 절대적으로 찌질하다. 난 그때가 아니고, 이미 그때가 아니니, 찌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때에는 숨이 막힐만큼 사로잡혔던 것이 이제는 찌질한 짓이 된 것이다. 영화를 보는내내 난 찌질했구나 생각했다. 이해된다. 그럴 수 있다 하는 공감은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영화가 개봉했을 즈음으로 나를 돌려놓고서야 절절해질 수 있었다. 이제 영화나 소설을 보고, 시를 읽으면 어느 때로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돌아가고자 하면 돌아가 지는 것이 용할 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너무 멀리 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누구랑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을 했었다. "신은 내 곁에 있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않고 계속 껄떡대는 것 같아." 종교인인 그 사람은 푸학!하고 빵 터쳤지만, 그랬다. 그런데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욕망은 내 곁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떠나지도 않았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다. 연기를 잘한다는 최민식이지만,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도연이 살해되는 장면은 그냥 너무 잔인하고 싫었다. 지금이라면 좀 다른 눈빛으로 살해를 하였을까?

 

 

 

하녀
The Housemaid, 2010 (임상수감독)

 

하녀... 영화라는 장르는 이래. 하면서 영화를 끝냈다.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종합예술이라고 하나? 영화를? 소설, 연극, 오페라까지... 다 포함해서 영화는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원래 해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나. 원래 그러려고 했나. 이 영화를 보면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자꾸 생각났다. 차라리 [아이 엠 러브]가 떠올랐으면 좋았을텐데... 돈과 폭력은 이정제의 근육과 피아노가 없었다면? 전도연의 백치하녀... 뭔가 앞 뒤에 덜커덕거리는 캐릭터에 전도연의 강력한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화려한 저택이 배경이 아니라면..., 모두가 포함한 것이 영화라고 하지만, 화려한 외출 뒤 악세사리를 모두 뗀 의상의 실체, 엄청난 코디능력으로 찬사를 보낼 수 있겠지만, 의상을 만든 사람은... 무능... 그 옷은 밥할 때도 입을 수 없다면... 무늬가 너무나 강했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감독의 행보로 보아 영상 미학에 꽂힌 것 같은데, 아니되오! 아니되오! 하고 싶다.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를 만들때만 해도 엄청 좋았지. 그런데 [친절한 금자씨]에 음악과 미학장치를 획기적으로 사용한 뒤, [박쥐]처럼, [설국열차]처럼, 그 이후에 만든 영화들.. 미학적이고 상징적이기는 하나. 시나리오에서의 내러티브 라인은 단순해지고, 시퀀스의 장치들은 승하게 되었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길만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맞붙여보던가...

무늬가 勝하면, 잎이 너무 만발하면, 꽃이 너무 많이 피면, 나무는 견디지 못한다. ..... 나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レンタネコ, Rent-a-Cat, 2012

 

다운 받아둔 일본영화 중에 가장 맹할 것 같았던 영화, 사실 맹하기도 했지만, 주인공이 입은 옷과 사는 집에 홀딱 반해버렸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길냥이들을 보살피며, 고양이를 빌려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요코, 자신은 고양이만 아는 척을 할 뿐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사실 그렇다. 이웃에 살면서 사요코의 약만 올리는 이상한 할머니만 있을 뿐이다.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완벽 고립, 고양이를 빌려주는 일을 하면서, 마음에 난 구멍에, 그 구멍속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외로움도 치유해가고 있는 있는 이야기다. 이 잔잔하고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보여주는 영상이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모두 보였다. 사요코의 손이 닿은 곳이라면 모두 햇살이 비춰지는 듯  마당의 작은 풀 하나까지 의미있게 환하게 팔락거리고, 사요코의 하늘거리고 편안한 옷들은 여름에 부는 작은 바람에도 일렁거렸다. 화면의 구석까지 모두 다 보였다.

고양이가 외로움으로 난 구멍을 메워준다는, 그래? 나도 그럼? 이라고 몇 번이나 유혹에 빠졌다.

 

남동생
おとうと, Younger Brother, 2010 야마다 요지 감독

 

카세료때문에 다운 받아둔 영화였다. [수영장] [안경] 예고편으로 본 [자유의 언덕] 캐릭터가 확 잡혀버린 카세료, 전에 출연한 영화는 어떨까? 왜 이렇게 강력한(강력하지 않은 초식남같은 캐릭터가 강력한) 캐릭터를 가지게 되었을까? 원래 그럴까? 사람이 변할걸까? 그런 것이 궁금해서 받아뒀다. 하지만 정말 쬐끔 밖에 나오지 않았다. 뭐가 되었건, 남동생은 재미있게 봤다.

누구네 집이든 한 집안에 하나씩은 우환덩어리가 있다. 이 집안에는 남동생 테츠오가 그런 인물이다. 그가 나타나지 않기를 온 집안이 바랄 정도이다. .... 이런 저런 사건을 일으키고,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누나는 그런 동생의 사고 뒷치닥거리를 한다. 원망도 함께 우여곡절! 남동생의 죽음이 임박, 극진한 간호, 죽음, 죽음을 지켜주는 착한 누나, 그리고 더 착해야된다고 반성하는 착한 딸... 착한 병에 걸린 일본 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눈에 안 보였으면 하는 친척이 있는데, 얼마전 그분의 이야기때문에 아버지랑 말다투을 한 적도 있다. 아버지는 이 영화의 누나같고, 나는 누나의 딸 같았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즈음 나도 먼 어느날 그 분이 돌아가실 즈음이나 돌아가시면 반성을 하게 될까? 하게 되겠지. 괜히 뭐라고 내뱉은 말들이 후회되었다. 속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말은 하지 말걸.....

 

 

동경가족
東京家族, Tokyo Family, 2013 야마다 요지 감독

 

새벽이 되어서 보기 시작한 영화, 보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사람이 사는게 모두 똑같구나. 이건 마치 줄리엣 비노쉬가 나왔던 프랑스 [ 여름의 조각들]을 보면서 느꼈던 지점과 비슷한 지점의 감정이 울컥였다. 가족이야기인데, 정확히 부모와 자식, 형제... 뭐 그런 것이다. 프랑스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늙은 부모를 둔 자식은 모두 비슷하다. 신기하게도 그렇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는 이런 영화를 안 만드네. 드라마도 안 만드네. 부모는 받아들여야 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자식은 견뎌야하는 삶을 견디기가 싫고, 언제나 한계가 있다. 결국 부모든 자식이든 그런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버겁다. 부모의 문제, 자식의 문제를 보태지 않아도 말이다. 일본사람들처럼 좀 익숙해지는 것도 좋겠다 싶다. 일본은 진짜 영화처럼 좀 쿨한 부모자식인가? 그럴까? 사실이 좀 궁금했다.  

 

이 영화는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를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동경 이야기,1953]를 리메이크한 영화라고 한다. 아직 [동경이야기]를 보지 못했는데, 1953년이나 2013년이나 ... 같은 주제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인간전형이라는 뜻이 아닐까?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 찾기,   절대적인 진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바뀌지 않을 인간전형....이것으로는 무엇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든 깊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딴 소리]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눈에 끌리는대로 영화를 본다. 고립된 공간에서 세상을 보는 유일한 창이 영화가 되었다.

실제 만나는 세상과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의 차이, 좀 더 자세하다. 좀 더 친절하다. 에너지가 덜 쓰인다.

좀 더 이렇게 살다보면...,

대개 누굴 만나 수다를 떨때, 누구는 말이지.. 하고 수다를 시작하면,

친구이야기를 하고, 동료이야기를 하고, 가족이야기를 할텐데,

나는, 영화의 누구, 영화 어디에 누구... 이러면서 영화 속 세상이 세상의 전부인듯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

일본 영화처럼 생뚱맞게 웃기거라는 생각이 든다.

친한 업계 선배가 자주 하는 말 "그렇게 살지 마요" 들리는 듯 하다.

계속, 끝까지, 이렇게 영화를 본다면, 그렇게 되겠지.

웃기겠다. 

그렇게 되진 않겠지? 난 그저 게임 중이니까...

깁스를 풀때까지 나는 꼼짝도 않고 오직 집안에서 노트북의 모니터로 보는 세상에서만 살아 보겠다는, 그런 게임 중이다.

그럼 어떻게 되나 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