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원고를 읽다가 얼른 1층 현관으로 내려가 라일락을 찍어왔다.
작가는 원고에서 라일락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향기란 그런 것이겠지.
아무것도 없지만, 다 들어찬 것처럼
변한건 없지만 완전히 변한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힘, 향기.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어.
어릴적 대문 옆에 있던 라일락이 그랬던 거지.
향기말고는 딱히 뭐라고 내세울 것이 없어 그냥 그 모양으로 존재감 없이 있다가
어스름해지면 어디선가 날아오는 짙은 향기에 어디지 어디지 하고 사방을 둘러 찾다보면 라일락이었다.
단번에 라일락이야! 했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며칠전 동료와 점심을 먹고 들어오다
회사 현관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목에 꽃봉오리가 맺혀있었다.
죽은 것 같은 고목에 얇은 가지하나가 삐져나와 살아있는 것도 용하고,
거기에 꽃으로 필거라고 야무지게 입 다물고 있는 꽃봉오리도 용하다며,
이름을 알 생각도 않고 참 용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전무님이 우리를 계속 보시고 계셨는지, 창문을 여시고는 "라일락이야" 하신다.
우리 둘은 동시에 "라일락이구나."
우리집 마당에도 있었다했더니, 동료의 마당에도 있었다했다.
그런데도 우리 둘 다 라일락을 못 알아본거지.
아무것도 없지만 꽉 들어찬 듯한 힘을 가진 향기,
향기의 최고봉 라일락인데 말이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문 옆 라일락 꽃 한 꼭지를 따다가 책상 머리에 올려놓고 향기때문에 공부도 안하고 싱숭생숭 그랬었다.
아마 봄이었겠지.
라일락 껌을 사면 씹기보다 겉껍질만 까고는 고개를 젖히고 코 위에다 껌을 얹어놓고
흐흡 흐읍하고 코로 숨을 들여마셨다. 라일락이 피지 않은 계절에.
우리 회사 라일락은 비교적 성글게 피었지만,
우리집에 있던 라일락은 작은 꽃들이 정말정말 빼곡하게 숨도 못 쉬도록 빼곡하게 피었었다.
특별히 진한 그 향은 어스름해지는 봄날 저녁 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서로의 몸을 부비면서... 나는 짙은 향인 것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어떤 존재감도이 없으면서, 떠오르는 기억조차 없으면서, 그저 그리운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