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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발비(發飛) 2012. 10. 8. 17:54

 

 

 

제주도를 다녀왔고,  그 뒤로...

추석이다 뭐다... 분주한 날들이 지나간 월요일이다. 

 

전열을 가다듬어야지! 일을 해야지! 하는데,

 

'거룩한 식사'라는 시가 자꾸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면 황지우시인의 '거룩한 식사'라기보다 내가 옮겨 적은 '거룩한 식사'이다.

 

태풍이 오기 이틀전에,  

사람들은 내게 태풍이 오는 제주로 왜 가냐고 했지만, 나는 태풍이 오니까 가는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비행기를 탔고,

늦은 밤, 조천읍에 있는 창이 넓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주인은 아마도... 마흔쯤 되었을, 아마도... 노총각일, 남자였다.

그는 막 도착한 나에게 아침식사시간은 여덟시라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여덟시가 되어 게스트하우스의 창이 넓은 카페로 올라갔다.

주인은 물을 끓여 드립커피를 내리고, 두장의 식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넣어 토스터기에 구웠다.

커피향과 빵내, 치즈내가 카페에 가득했다.

주인은 자신이 익숙한 순서대로 식사준비를 하는 듯 했다.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주인은 조리대의 안쪽에, 나는 조리대 바깥쪽에 마주 앉았다.

커피 취향을 묻고, 커피를 따르고, 치즈가 흘러내리는 토스트를 접시에 담아주었다.

 

주인이 내게 입에 맞느냐고 물었다.

"좀 뜨거워요."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다.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흐린 날의 향은 맑은 날보다 더 진하다.

 

나는 태풍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꼼짝않고 그곳에만 있었다.

그날 그집에서는 창이 넓은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곳 주인은 태풍에 큰 창이 깨지면 안된다며, 바다를 향한 풍경 좋은 모든 창을 마스킹테이프으로 봉했기 때문이다.

 

"아... 안되는데.... 그럼 태풍을 볼 수 없잖아요. 뚫어주세요!"

 

주인은 문구용 칼로 창을 내어줬다.

이틀 내 나는 그 조그만 창으로 바다에서 오고 있는 태풍을 보았다.

마치 나의 집인 것처럼, 그곳을 왔다갔다하면서 말이다.

 

비바람은 이틀내내 쉬지 않고 불어 재켰다. 그런데도 아직 태풍이 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진짜 태풍이라던 날, 두어 시간 세차게, 대단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쓸고 지나갔다.

태풍은 천천히 와서, 빠르게 지나가는 거라고구나 생각했다. 

 

이틀동안...나는 사방 바다 바람이 불어대는 그 집에서, 가끔 작은 창구멍으로 밖을 보며, 그의 커피와 토스트를 먹었다.

초록 숲을 가기 위해 그 집을 나오는 날 아침, 나는 내 여행의 모토로 삼았던,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숲이 되고" ... 박국장님이 그려주신 나무그림을 사진으로 인화한, 그 한 장을 주인에게 내밀었다.

 

"감사했어요. 특별히 드릴 것은 없고, 이것으로...." 얼버무렸다.

"뒤에다 뭐라도 써주시지요." 그가 내가 건넨 카드를 다시 내게 건넨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났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인화한 그림 뒤에 황지우시인의 [거룩한 식사]를 옮겨적었다.

미끄러운 인화지의 뒷면에,  흐린 볼펜에,  어설픈 필체로, 내 마음인듯 옮겨적었던 시였다.

시와는 달리... 나는 분명 그에게 따뜻한 커피와 토스트를 얻어 먹었으나... 나는... 이 시를 옮겨적었다.

다시 카드를 건넸다.

그 주인은 무엇이 민망한지, 카드를 읽지도 않고 펼쳐져 있던 책 사이에 꽂고는 책을 덮었다.

나는 뭐라고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나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따뜻한 밥을 먹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