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2010년 5월 자화상

발비(發飛) 2010. 5. 15. 02:30

 

 

 

 

욕실이 맘에 든다.

좋아서 욕실리모델링 기념으로 자화상을 그려봤다.

공사 중에 일하는 아저씨에게 바닥 타일 하나 얻어다가 크레용으로  스스슥 그리고는,

공사가 끝나자마자 여기는 내 욕실이라고 턱하니 걸어두었다.

여긴 새 건데.. 내 꺼.

 

이 집에 오래 전에 이사왔을 때 지은 지 20년이 넘은 아파트라 형편무인지경이었지.

그때 형편상 다른 곳은 대충이라도 수리를 했는데,

욕실은 세면대만 겨우 바꿨었다.

그러고 살다가... 살다가...

이번에 백수가 되어 집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

방 아니고는 갈 곳이라고는 욕실 밖에는 없어,

갈 때마다 둘러보면

너무 구리다. 구려도 너무 구리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실리콘 하며, 갈라진 세면대 하며,

이렇게 환경이 구리면 나도 구린데.. 하다가도 에이 그냥 개기자 하다가,

지난 주에 드디어 사단이 났다.

샤워기 수전이 뚝 부러진거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은 상태로 그래도 뚝!

한밤중에 욕실이 하얗게 선녀탕이 되고, 그냥 둬야 하나 어쩌나 하나 그러다가

오래전 내 친구 미래가 동전으로 수압을 조절하면 된다면서,

몸소 가르쳐주던 것이 떠올라 대충 물을 막았다.

문제는 수리,

다음날 아침 종합수리, 종합보수에 가서 샤워기 수전을 교체해달라고 했고,

그거 하나에 뭐가 그리 비싼지.. 7만 오천원이란 걸 깍아깍아 6만5천원에 갈았다.

정말 문제는 상대적 열등.. 이거 정말 약이 없다.

샤워기 수전을 뺀 나머지 것들과 샤워기 수전의 그 양극화 현상.

나는 욕실을 갈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모두가 열등하거나 모두가 우등이라면 견딜 수 있었을텐데,, 비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빛나는 것은 더욱 빛나고,

수그린 것은 더욱 수그리고,

그것을 보는 이는 인생이 정말 저래야 돼.

그래 결심했어.

욕실 리모델링.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결정을.

백수 주제에 앞 일을 내다 보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에 욕실 리모델링이라니,

욕 먹을 거 아는데,

개념 없는 거 아는데,

너무 간절히 원했으므로.. 그것이 아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분명 다르다.

인터넷으로 일박이일동안 욕실 리모델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습득하고,

유일하게 타일턱 공사 사진이 올라와 있는 곳으로 업체 선정.

어제와 오늘.. 정말..

욕실 벽면은 하늘색,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색,

욕실과 같이 보이는 현관바닥도 타일 작업, 현관 옆으로 같이 보이는 싱크대 전면 타일 작업, 이것들을 빛나게 해 줄  형광등 작업

다 했다.

오후 늦게 공사가 다 끝나고 업체 사람이 갔다.

그때부터 청소를.. 공사 뒤 청소를 했다.

쓸고, 청소기 밀고, 키친타올로 일단 닦고, 그리고 키친타올로 한번 더 닦고, 그리고 걸레로 또 닦았다.

그랬더니 이틀동안 공사하느라 발칵 뒤집어진 집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동안 신발신고 돌아다니고,

욕실을 쓸 수 없어 찜질방에서 자고,

괜히 욕실을 닮은 꿀꿀한 삶이 싫다고 우기며 시작한 일이 끝났다.

쳇,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달라지지.

아직 다 마르지 않아...욕실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엉거주춤해야 하지만

그렇게 엉거주춤하다보면, 날고 뛰지도 않겠냐는 거지.

싫증 나, 견딜 수 없어 하고 시작한 것이 마치 더는 삶에서 할 일이 없는 듯 뿌듯하다.

이대로 삶이 쫑나도 뭔가 보람찬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니 인생이 가볍지.

이것과 바꾸니 말이야.

 

더 없이 가벼운 인생아,

욕실 질러놓고, 인생 잘 산 듯 좋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