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종이컵 도자기 받침

발비(發飛) 2009. 11. 20. 13:06

사무실에 종이컵 도자기 받침이 생겼다.

모두들 하나씩 나눠가졌지.

프라스틱으로 만든 싸구려필의 종이컵받침을 미용실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꽤 멋진 일러스트가 그려진 하얀 도자기 컵받침으로 왠만한 컵보다 이쁘게 생겼다.

맘에 들었다.

종이컵에다 커피믹스를 하나 따서 커피를 탔다.

그리고 컵받침에다 꽂고는... 으음, 좋다.

마치 뭐 같네!

하고 습관대로 손으로 컵을 에워잡았다.

 

그런데,

컵이 차다.

커피가 담겨지지 않은 컵을 든 것 같다.

분명 안에서는 김이 나는데, 컵은 아니다.

의심이 갔다.

의심이 가고 나니, 뜯어보게 되었다.

종이컵이 도자기 컵받침 안에 잘 맞게 끼워져 있다.

그런데 결핍의 모음 같았다.

모자라는 것들.. 이 엉겨 있다.

모자라는 것 같으니라고...

 

둘이 되었는데 모자란다.

사실 효용성이나 실용성, 편리성으로 보면 차고 넘치는데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왜?

결핍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종이컵은 훌륭하다.

환경문제나 자원문제의 몫이 있지만, 종이컵의 탄생으로 우리의 삶은 무지막지 하게 변했다.

찻집이라는 곳을 가지 않고도 거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참 추운 요즘 같은 날씨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

맥주 한 잔에 쏴해진 몸을 달래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의 2차,

...

얼마나 훌륭한가.

종이컵이 태어나는 순간, 최고야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그런 첫느낌으로 종이컵과 함께 하고 있다.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었다.

멋진 모양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도자기 컵받침으로 종이컵의 결핍은 내놓고 드러내고 있다.

책상위에 도자기 컵받침을 두른 종이컵이 놓여있다.

 

우리는 그대로를 인정할 줄 모른다.

그대로 그 모습일 때,

원래 그 모습일 때의 최고를 모른다.

그 자체를 달리 어째 보겠다는, 아니지 더 낫게 어째 보겠다고 하는 순간, 만천하에 결핍은 드러나고 만다.

결핍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우냐? 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이세상 모든 것은 결핍을 포함하고 있다.

결핍은 공간이다.

공간이 있어야 숨을 쉰다.

공간이 있어야 몸을 움직인다.

우리의 결핍은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다.

 

난 나의 결핍이 언제나 힘들지만,

남들이 아는 나를 듣다보면, 내가 가진 결핍을 말하고 있다.

내게 채워진 것에는 색이 머무르지 않는다.

내게 빈 공간은 색과 形을 가지고 있다.

 

종이컵을 도자기 컵받침과 분리시켜야겠다.

얇은 종이컵을 손으로 감쌀 때의 뜨겁게 전해오는 순간의 긴장감을 그대로 즐기겠다.

 

그런데, 일러스트가 이쁜 도자기 컵받침...무엇으로 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