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 모래장
모래葬
송재학
사막의 모래 파도는 연필 스케치풍이다 모래파도는 자주 정지하여 제 흐느낌의 像(상)을 바라본다 모래 파도는 빗살무늬 종종 걸음으로 죽은 낙타를 매장한다 모래葬을 견디지 못하여 모래가 토해낸 주검은 모래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 모래 파도는 음악은 아니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빌려 사막의 목관을 채운다 바람은 귀가 없고 바람 또한 귀없이 들어야한다 어떤 바람은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모래가 건조시키는 포르말린 뼈들은 작은 노(櫓)처럼 길고 넙적하다 그 뼈들은 모래 속에서도 반음 높이 노를 저어갔다 뼈들이 닿으려는 곳은 모래나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이다 고요조차 움직이지 못하면 뼈와 櫓(노)는 증발한다 물기 없는 뼈들이 기화되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너무 가벼워 사라지는 뼈들은.
사는 것과 죽음이 이르는 곳은 그 모양이 닮았다.
어떤 이는 어디를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라 하고, 어떤 이는 대체 언제 나를 데려가나 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그 둘이 닮았다고 한다.
사막을 가 본 사람은 안다.
그 곳에서의 삶이 삶이 아닌 것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어 경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죽어 껍데기 혹은 알맹이만 남은 것들 또한 무릎 꿇어 경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차라리 사막이라면... 하고 생각해본다.
사막은 바람이 일때마다
시인은 사막을 바다라 했고, 사막이 바람에 주름진 모양을 파도라 했다.
굵고 높게 파도치는 모래 바다 위를 그 곳에서 살다가 죽은 낙타의 뼈, 노를 저어간다고 했다.
죽고서도 그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끝까지 닳아 없어져야만 생을 마치는 그 곳
차라리 사막이라면 그것이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살아있는 것에서 매듭짓지 않고
한 마디를 지나서 죽음이라는 새로운 마디를 시작하면서 다시 생을 시작하는...
이것은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막에서 그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인도의 갠지스 강에서 죽음을 맞이하려고 몇 천 킬로를 걸어와서 죽는 그들과 같은 것이다.
삶은 삶을 끝낸다는 것은 그렇게 지독한 것이므로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으므로
생을 유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이 모두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죽음에서 죽음 다음으로 이르는 길이 더 가혹함을 알기 때문에
.... 우리는 그것을 모른 척하고 그 마디를 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을 긁어보았나.
뼈가 드러나도록 다쳐보았나.
살과 뼈가 모래에, 태양에 긁히는 그 고통은 살아서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죽어서도 뼈를 갈아내는 고통은 고통이다.
우리는 겨우 무릎 꿇는 일에 아프다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결국은 가야하는 곳에 그런 고통이 있다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디어야만 삶과 죽음과.. 모든 것들에게서 아무것도 아닌 기화된 , 흔적없는
자연을 누릴 수 있다했다.
사막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시인이라는 족속들은 그렇다.
이렇게 고통을 찾아서 헤매는 것이다.
내가 시인이 될 수 없는 이유임과 동시에 시인을 경외하는 이유이다.
나는 고통받기 싫다.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