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조연호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발비(發飛) 2009. 5. 25. 16:52

 

*시집을 구할 수 없었다... 수록 시들을 인터넷에서 구해 옮겨보았다.

 

 

죽음에 이르는 계절

조연호| 천년의시작| 2004.08.25 | 90p | ISBN : 899023543X

 

 

1.라면집에 모여있던 소년들

 

가슴에 시추공 하나 깊게 뚫린 줄 모르고 태연히 바람 부풀리는 떡갈나무를 보았네

이쑤시개 물고 소년들이 라면집에서 걸어나오고

불모지가 어느날 풍성한 명아주 한 두름 배 아래로 쏟아내는 걸 바라보았네

길고 두툼한 욕지기가 실패 같은 소년들을 칭칭 감았네

어두운 골목에서 서둘러 빨아당기던 담뱃불의 짧은 命보다 하루는 더 짧아지지 않았지만

달궈진 무쇠들 안의 밀반죽처럼 흡, 숨을 들이마시고 소년들은 한껏 부풀어 올랐네

 

후둑후둑 젖으며 떡갈나무에게로 비가 걸어왔네

라면집을 나온 소년들의 배부름은 배고픔과 같아지고

그 위로 어둠이 빈 손을 벌리고 둥둥 떠 있었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러하듯 운명이 유치하게 눈 흘겼네

비가 오면 라면집 소년들은 진저리 치며 알을 까는 처마 밑 나방 같았네

해거리 현상 때문에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린,

소년들의 무거운 가지를 솎아주러 가고 싶었네

 

나방의 뚱뚱하고 주름진 배에 홀려 온종일 라면집 앞을 서성였네

그런 날은 초벌로 구워진 내 몸이 많이 뜨거워 했네

가스불처럼 훅훅 하늘로 올라가던 나뭇잎에게 귀 대어보았지만

빈 그릇에선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았네

뜨겁게 끓던 라면국물을 앞에 두고 소년들의 사기그릇이 발가락을 모으고 눈부셔 했네

 

 

 

 

 

 

 

2. 죽음의 집

 

 

 

하늘이 녹물처럼 붉게 일었다. 모든 기억이 한 개의 덩어리였어. 새들이 신중하게 생명 以前으로 날아간다. 나는 茶器店에서 기다리는 애인을 데리러 슬리퍼를 끌고 자취방을 나와 좁은 골목 낮은 담벽을 걸었다. 벽지는 썩고 벽은 자꾸 물을 품고 달관한 듯 세상 쪽으로 기울었다. 그 벽 한구석에 나는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 「죽음의 집」을 붙여놓았다. 창 밖의 비극적 세계관이지 않은가, 죽은 사람을 흰 천으로 덮어놓고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끌칼이 지나간 자리로 매섭게 파인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되도록 자세하게 어둠과 대추나무와 이름 없는 마룻바닥들에 대해 말하려고 애썼다. 아니, 나는 바닷가로 가서 뜨거운 모래 위에 수많은 바다거북의 알을 낳고 행복하게 죽어가고 싶었다.

 

 

 

 

 

 

 

3.죽음에 이르는 계절

 

 

 

팔뚝 위를 눌러 희미하게 돋는 실핏줄에 입 맞춘다. 감사한다, 펄펄 뛰는 피톨들도 가져보지 못하고 이제 立春. 산책길의 태양은 헐렁한 양말처럼 자꾸 발뒷꿈치로 벗겨져 내리고 붉은 잇몸을 보이며 어린 연인이 웃는다. 그날은 군대 가서 죽은 사촌형이 내 뺨을 쳤고 물 빠진 셔츠 얼룩을 닮은 구름이 빨래줄 위를 평화롭게 걸어갔다. 마지막 인과라 생각하며 문 열어두었던 붉은 봄날. 감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3권, 5~6세기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 근처에 개미떼들이 커다란 구멍을 슬어놓은 봄날. 골목의 버려진 상자마다 바람의 손가락들이 채워진다. 화장실에 앉은 여자들이 노란 열매를 먹고 노란 빛으로, 푸른 알약을 먹고 푸른 빛으로 변하는 리트머스페이퍼였던 봄날. 연인의 목 안에서 바람이 방부제처럼 녹아갔다. 감사한다, 인간이라는 짐짝. 짐짝이 점점 무거워질 때 바람의 거짓말이 푸석푸석 아름다워져 간다. 사람들의 발목에서 넓고 가벼운 날개를 꺼내던 마술의 立春. 감사한다, 맑은 정오에 구릉을 지나던 객차와 화차 사이에 어린 아이가 끼어 죽은 날.

 

 

 

4.시월

 

 

나이 스물 여섯, 자살이 아름다워 보이는 나이, 스물 여섯은 그지없이 행복하다. 불 밝힌 거리가 창 닫힌 거리를 짓밟으며 뛰었다. 스물 여섯, 짐 모리슨보다 더오래 살고 혁명에 덜 더럽혀진 세대, 나는 쓸쓸한 거리에서 연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대야속에 가루로 된 세제를 풀었다. 때묻은 동전 같은 시월, 거품이 날 때까지 등없는 거리가 빨래를 비볐다, 시월엔 정든 뿌리가 나를 땅 밑으로 데려갈지도 몰라, 시월은 머리맡에 꺼진 영혼의 재떨이를 놓아두엇다. 담배 끝이 과꽃보다 붉게 꽃잎을 열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기막힌 상상도, 비열한 폭로도 시월의 책방엔 적혀있지 않다.

나는 손가락 끝에 모인 죽은 피를 바늘로 터뜨렸다. 시월의 나이인 스물 여섯, 아이들

 

 

 

 

 

5.달의 목련

 

 

 

겨우내 나는 길눈이 어두웠다. 나는 또 詩라는 잘 닫히지 않는 상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 맑은 소년 같던 옆집 고양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평생 바람을 퍼올리던 아카시아숲, 나는 또 病이라는 낡은 산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가 남기고 간 화분 속 석회가루들이 잎새 쪽으로 희게 몰려간다. 고즈넉한 자목련과 친족들의 장례와 트럭 폐유의 냄새, 모든 걸 다 숨기기에 이 상자는 너무 거짓말이 많았다. 소음벽 아래 모인 목련이 용서로 가득 채워진 꽃잎을 꺼낸다. 다만 한 발짝씩 기억에서 발을 옮겨놓았을 뿐인데도, 좌판을 벌이는 노인네의 감자 몇 알처럼 뎅글뎅글하게 달이 떠오른다. 생명체가 있을지도 몰라, 시력 나쁜 애인은 깊게 패인 쪽의 달이 신비롭다. 전생이 있다면, 그것이 서로의 열매를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의 흔들림이라면. 목련이 있던 자리에서 한걸음 비껴서서 목련꽃이 핀다. 달의 인력이, 애인의 월경이 목련을 끌어당긴다. 영영 소년이 될 수 없는 아이와 상자 속의 거짓들은 용서 받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6.길을 향하여

 

 

 

비가 온다. 비는 길 위의 사람들을 허물며 처마 끝으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구름은 둔덕을 두드리며 걸어가고 나를 닮은 가지 하나가 빗발을 꺾으며 물길에 떠내려간다.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구름 뒤편에 머무는 맑은 소리들이 먹으로 번진 하늘로 옮겨온다.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7. 열매를 꿈꾸며

 

 

나는 순을 밀어올리며 껍질 밖으로 나왔다. 땅 위에 하늘의 끝자리를 조금씩 올려놓으며

안개가 내려올 때 다발 꽃을 손에 쥔 아이가 허전한 꿈가를 뛰놀고 있었다. 아무도 그 곳에

와서 기웃거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이의 걸음, 한 줌의 사랑에도 묶이지 않았다. 안개는 강과 함께 흘러가고 들풀의 잠결로 깔깔한 삶이 두근거렸다. 그리움을 뒷전에 두고 나는 망울을 터뜨리며 봉오리 밖으로 나왔다. 몇 장의 꽃잎이 내 빈 손에 넓은 잎의 속죄를 쥐어주고 있었다

 

 

 

 

8.불을 꿈꾸며

 

 

 

더러운 싸전 골목길로 비둘기들이 흙먼지처럼 내려온다. 아이들처럼 손에 흙을 묻히고 말없이 놀던, 할아버지의 치매는 겨울나무처럼 깡마르고 적요로왔다. 열린 문 뒤쪽이 싸한 박하사탕을 물고 보조개 가진 여자애처럼 웃고 있었다. 어미 밖으로 바글바글 몰려나오는 빨간 거미 새끼들이 황혼보다 붉고 아름다웠다. 풀들에 의지해서 소들이, 소들에 의지해서 사람들이 살아간다. 겨울잠이 몽당연필처럼 짧아지고 깊은 겨울잠 속에서 찬피동물들은 푸른 물결보다 싱싱했을 것이다. 가끔씩 이 지리멸렬은 끈 놓친 풍선처럼 부풀며 하늘로 날아올라 가뭇없이 터져버리곤 했다.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 던졌고, 항상 돌은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갔다. 어떤 이가 몸 속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식물에게 四柱가 없는 것이 슬펐다.

 

 

 

 

 

 

 

9. 사생대회

 

 

 

아이들이 정화조 뚜껑을 열어 천국을 확인하다. 뚝방길로 사생대회 나온 아이들이 바람 몇 가닥을 밑그림으로 그린다. 바람의 색감은 굵은 몇 줄의 온통 비천함. 드라이플라워처럼 거꾸로 매달려 풍경들이 말라간다. 내 농담말에 찰흙인형처럼 웃던 엄마를 처음 만난 곳. 물결이 그러하듯 처음 흔들린 곳에서 너무 멀리, 沼는 아이들에게 칙칙한 갈색 크레파스를 골라준다. 빨간 새끼거미들을 꺼내놓고 흰 거미알들이 하나씩 빈상자가 되어간다. 한평생 여름과 대화해보지 못했을 푸른 나무 잎새들이 도화지 안쪽에 빼곡히 자란다. 울던 엄마를 따뜻한 열매 속에 처음 넣어준 곳, 도화지 위의 허무하고 붉은 꽃이 완성되는 순간.,

 

 

 

 

 

 

 

10. 모래내

 

 

 

높게 매달린 타워크레인은 저문 날이 들어올 수 있도록 허공에 둥지를 만든다. 오늘은 東 쪽이 吉한 날, 모란꽃 활짝 핀 이불홑청 위에서 누나는 화투점을 맞춘다. 아침을 따라 발목 시린 물가까지 걸어왔지만 아무도 吉하지 않았다. 향수를 바르고 週報 돌리는 여자들 곁을 서성대는 것이 즐거웠다. 가출했던 누나가 행복하게 머리를 틀어올리고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간 날, 종교는 病을 앓았다.

 

타워크레인이 허공에 잿빛 점자를 찍는다. 구구단을 외며 콩나물 한 봉지 사오는 여자아이에 대해, 몽상하는 공단 굴뚝에 대해, 일요일은 가혹한 점자를 읽는다. 떠나기 전에 언제든 연락하겠다고 모래내는 내게 약속했었다. 따뜻한 얼굴과 아름다운 노래를 아무 데서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아이들이 개들과 함께 동네 쓰레기통을 들쑤시고 다녔다.

 

 

 

11.어떤 꿈의 거푸집

 

 

문 앞에 쌓인 고지서들이 나를 고분고분 납기일 안쪽으로 묶어둔다. '김윤정 X년' 이라고 못을 쓴 허망한 미루나무 둥치로 허망한 나뭇잎들이 회귀해온다. 누이와 아버지는 즐겁게 아베마리아를 불렀고 어느 날 누이는 이혼하고 아버지는 불법취업을 위해 오사카행 배를 탔다. 전철 옆 방음벽에 귀를 대고 파잎이 잠든다. 회귀해오는 나뭇잎들이 반쯤 썩은 벽지 안에 담긴 헐거움이었다. 휴일이면 누이가 쉰 음식처럼 시큼해져 간다. 生도 歿도 없이 비탈길의 나무는 쇠톱날이 자기를 갉았던 때를 평화롭게 되새긴다. 여름날 노란 솜양지군락이 익사체처럼 흉측하게 바람 위에 드러나곤 하면 누이는 아,하고 눅눅한 한숨으로 가슴께에 거푸집을 만들곤 했다.

 

 

 

 

 

12.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구형 라디오 지직거리는 볼륨 아래 쎄미클래식이 흐른다. 오래된 천장을 가진, 내 희망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세탁소로 빨래감을 안고 들어간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잘디 잔 먼지들이 권태롭게 허기지게 쏟아진다. 이불빨래도, 울빨래도 드물던 6월. 마당에 팽팽히 조여진 빨래줄이 가릉가릉 나른한 고양이 울음을 운다. 비눗방울처럼 희고 맑게 터지고 또 부풀어 오른다.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산꼭대기로 오르던 과일장수 여자의 두꺼운 팔뚝이 행복에도 불행에도 가깝지 않았다.

 

언제나 세탁소는 낮 얼마간 게으르고 투명해진다. 퍼덕이는 지느러미의 힘에 책장 몇 쪽이 함께 넘어간다. 게으른 비누거품들이 포플러 잎새 밑에 고인 그늘 속을 빠르게 헤엄쳐 간다. 물과 가루비누의 비누방울 외에 아무것도 그의 청춘을 묶어둔 것은 없었다. 비누방울처럼 가벼운 알을 낳고 싶어 그는 늘 아파했다. 한나절 동안 메모지에 기록했던 여름과 가을의 모든 태양이 소멸할 때쯤, 세탁소는 그제서야 아이들의 더러워진 소매가 궁금하다. 아픈 팔을 흔들며 겨울외투가 천장에 매달려 있던, 세탁소는 애인이 두고 간 결별辭와 함께 구질구질해져 갔다.

 

 

 

 

13. 염전

 

 

 

 

14. 비 내리는 한 철

 

 

 

雨期의 나무들은 쉽게 소리에 긁히곤 한다. 엄마의 잘 들리지 않는 귓전에 숲이 가늘게 걸려 잇다. 문턱엔 消印도 없이 꽃들이 지고 여름의 웅덩이엔 여름 아닌 것들만 모여 있었다. 아이들이 싸놓은 모과처럼 노란똥, 가까이 가면 숨었던 하루가 쉬파리처럼 어지러이 날아오른다. 아이들이 맨발로 비를 쫓아간다. 체한 속이 손가락 끝 피 한방울로 깨끗이 흘러나가던 여름, 미군부대로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Sweet Home Alabama가 흘러나왔다. 구름이 몰려간 자리를 차츰 기억해 내고 물웅덩이의 눈매가 깊어진다. 작은 손거울이 물 한방울 젖지 않고 강을 건너 강 건너 사람을 적시던 날이었다. 나는 다 불어터진 여름숲에 앉아 어릴 적 童謠를 신기하게도 모두 외워 불렀다.

 

 

 

 

15. 수로

 

 

 

 

16. 나쁜 혈통

 

 

 

그날 한밤의 토끼몰이는 어찌 되었을까. 맑은 속을 꺼내놓은 감나무가 다홍빛 열매를 곁에 두고 산모의 심정으로 모든 걸 지켜본다. 아픈 발목이 산턱을 걷고, 비린 산개암 냄새가 산 아래쪽부터 쫓기듯 서둘러 산을 오른다. 숨어 있던 길이 풀무치처럼 튀어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날 놀란 붉은 눈들은 어찌 되었을까. 마구 자란 발톱이 양말을 뚫고, 늘 먹던 저녁밥에서 담담한 총성이 흘렀다. 아주 낮게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 하나 하나마다 밥알들이 머리를 세웠다. 새우잠을 지고 난 후에도 正午는 어두웠다. 어찌 되었을까, 벙어리들이 쑥밭을 짓밟으며 달아난 길. 어디선가 들려온 낮은 목청에 놀라 어두운 거리를 밖에 세워두고 울타리가 조금 키를 높인다. 어찌 되었을까, 멀리 無間地獄에 소금기둥처럼 서 있던 감나무 잎들.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꺾이고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젊어진다. 방울을 울리며 사람을 몰아가던, 그 날 눈 빨간 사람들은 모두 어찌 되었을까.

 

 

 

 

 

 

 

17.오월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넓은 운동장에서 d국가를 배우고 아무 일 없이 도시락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지로 덮어놓은 상을 벗기면 숨었던 간장 냄새가 상 밑으로 흘렀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오월의 참깨가 소롯길을 깨알처럼 품으며 익어가고 사람들의 낫질에 풀들이 질린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붉어져가는 하늘을 얹고 전깃줄이 무거워진다. 구슬피 우는 사람들 곁으로 나방들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붉고 아름다운 꽃떨기 위에 혀끝을 대고 곤충은 인간이 울음을 맛보고 싶다. 담벽에 여자 성기를 그렸다고 한길까지 몽둥이를 들고 엄마가 어린 나를 쫓아왔다. 기억 박에서 나무가 숨쉬고 나뭇잎이 세상보다 넓어졌다. 태양이 이렇게 가루져 내리는 날에 정말로 기억은 아프지 않은가. 죽은 몸이 산 몸을 씻기던 그 해의 다섯 번째 달. 나는 빙과를 먹고 싶어 엄마의 손지갑을 열었고 어느 날 오월의 나무들이 내게 낯가림 했다. 봄볕 내리던 날, 다투어 가지 않아도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만나졌다.

 

 

 

 

 

 

 

18.오월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봉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19. 쥐의 날

 

 

국수를 삶으며 생각하는 쥐의 날, 단단히 묶은 폐휴지 사이에 얇게 접혀 있던 쥐의 날, 쥐약을 쳐야지, 라고 마음먹은 쥐의날. 약병 속에 단단하게 뭉쳐있다가 누군가의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들어가 위벽을 헐어내고 싶었던, 엄마의 등때를 밀어주고 싶었던 쥐의 날, 미루나무가 내게 고아라고 불러줄 때. 뙤약볕이 나무를 녹여 동글동글한 오색구슬을 만들 때, 벌레들아, 너희들의 잠은 얼마나 설익은 밥알들이었니? 한낮 공원에 앉아 타들어가는 담배와 함께 하늘로 풀려 올라가던 쥐의 날, 녹슨 철봉대에 반쯤 칠이 벗겨진 채 서 있던. 세상의 기억 모두가 엄마젖을 빠는 외로운 포유류들이기를 바랐던 쥐의 날, 우윳빛처럼 흰 부고(訃告)가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던, 돌아간 그가 그리워 눈물흘리던, 밤새 기둥을 갉아 마땅한 쥐의 날

 

 

 

 

20.유월

 

 

 

걔집애들이 쪼그려 앉아 맑고 투명한 땀을 쥐며 공기놀이에 열중한다. 얼굴을 만져주던 綿絲 같은 잠이었다. 덥고 더럽고 지켜야 할 것 많은 유월, 물웅덩이가 바람개비처럼 어린 모기들을 훅훅 창가로 날려보낸다. 타인절대금지, 라고 써넣은 팻말을 화장실 문에 못질하던 노인의 손이 오늘은 붉은 애호박에게 끈을 고쳐 매 주었을 것이다. 애정 없이, 허기진 기억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어리고 어질고 어지럽혀진 유월, 문밖을 나서면 어미새처럼 둥지 주위를 맴돌다 푸드득 날아가는 골목길이 자기 울음보다 더 밝아지곤 했다.

 

 

 

 

 

 

21.얼음불꽃

 

 

부지깽이 끝에 매캐한 연기가 걸려 올라온다. 겨우 입 벌린 메꽃 한 송이가 되어 엄마 곁엔 순산한 셋째 계집애가 누워있었다. 손가락 다섯, 발가락 다섯, 생식기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 엄마가 편히 눈을 붙였고, 누룩곰팡이가 아랫목을 따라 끊임없이 기어다녔다. 달그락거리는 배고픔들이 따뜻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밤새 꿈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강이 빈한한 날을 지난다. 부지깽이를 쥔 엄마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불곷나무가 자란다. 뿌리며 가지며 아궁이 속을 확확 드나들고도 나무는 아직 차갑다. 누이가 몰래 자작시를 보여준다. 그 시구에 내가 유치한 눈물 훔치다가, 이 저녁은 느닷없는 평화 속에 끝난다. 강이 투명하고 가벼운 수의를 입고 강 건너 천안댁 할머니를 부르러간다, 미역줄거리가 끓고, 부지깽이를 저으면 화르륵, 엄마들이 일어서다간 도로 누웠다.

 

 

 

 

 

22.수목한계선

 

 

 

목책 건너편에서 사랑이라곤 알지 못하는 이가 나를 부른다. 많은 꽃을 머리에 이고 그가 어둠을 삼켜 보인다. 대궁 밖으로 밀어올려진 한낮의 빛은 꽃의 상상에서 너무 멀리 걸어왔다. 아무렇게나 코피를 쏟으며 병약한 노을 아래 누워 있던 나무의 마지막 걸음. 죽은 관목에게로 잎새가 되기 위해 하늘이 몰려간다. 그에게로 가는 가시 돋힌 영혼들은 모두 병약하고 키가 작아진다. 목책 건너편에서 종말이라곤 알지 못하는 이가 나를 부른다. 새들과 짧은 사랑을 나누고 떨기나무는 우듬지를 꺾어 그에게 던져준다.

 

 

 

 

23. 꽃 없는 나무, 제주

 

자드락밭에 심긴 상치가 병든 닭처럼 졸았다. 아버지의 찬송이 꺾인 목소리로 들려온다. 그리운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문 밖에 세워둔 것은 아닐/가. 문 열어두면 문 밖엔 아무도 없고 골판지 같은 나무들이 서로를 밟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달걀을 썩혀 만든 술을 드시고 어머니가 달걀을 풀어 내 도시락 찬을 만들었다. 지겨운 달걀부침 아래 김칫물이 흘렀다. 그쪽으로 가지마라, 사람들이 개처럼 엎어진 곳이다. 나는 산도 골도 아닌 한 곳을 가리키며 할아버지가 무섭게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집 뒤로 자란 무화과나무 암자색 열매가 붉디 묽게 벌고, 날파리들이 그 위를 무심하게 걸어갔다. 무화과, 꽃없이 열매 맺는 나무. 할아버지는 술 담배를 끊고 교회 다니며 십일조를 냈다. 오랜 전의 죽음들이 흘러 내게 꽃 없는 나무의 달디단 지붕을 만들어준다. 무화과; 봉오리도, 만개도 없는 지루한 삶이 툭, 하고 붉게 터져나간다. 개처럼 엎어진. 할아버지는 또 술을 썩혀 먹고, 어느 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위해 회개했다.

 

 

 

 

24.매립지

 

 

 

풀들은 눌은 벽지처럼 매립지 바깥쪽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라면을 끓이며 봉지에 적힌 글들을, 조리방법과 첨가물과 맛있게 먹는 법을 내처 읽고 읽었다. 유통기한이 딱 하루 남은 이 고결한 식사. 내가 묻힐 것이고, 나보다 먼저 버려진 것들이 묻혔고 버려진 것 이전에 산 것들이 묻힌 매립지. 내가 노려보았던 자들을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넝마꾼이 되어 주워올릴 수도 있으리. 어두운 영화관 좌석에서 애인이 몰래 피우던 담배연기는 태양에 가깝게 다가간 바람처럼, 내가 쓴 愚問처럼 쉽게 부서졌다. 면사같이 가늘고 긴 기억이 국수틀에서 뽑혀 나왔다. 풀들은 수상하게 매립되어 있는 길로는 걷지 않는다. 나는 아무 무게도 없이 코피 흘렸다. 꾹꾹 눌러 담은 쓰레기들, 그 위로 얇게 덮인 흙, 그 위로 다시 트럭들이 지나다녔다.

 

 

 

 

 

 

 

25.금요일의 자매들

 

 

 

가출 중인 여자애의 가짜 속눈썹은 길고 아름다웠다. 태양의 섶 아래 은백양 잎이 번데기를 달고 흔들린다. 과수원 딸년들이 모여 가난을 다 덮고도 남을 긴 주름치마를 만든다. 내 일생엔 한 장 짜리 편지조차 쉽지 않다고 낭하의 여자가 말한다. 텅 빈 가지 안쪽에서 여름 내내 여름만 기다리던 그녀들의 떨켜. 금요일엔 자매들이 매화나무 그늘 아래서 황록색으로 익어간다. 여름이면 마룻바닥에 누워 빨강머리 앤에게로 영혼을 떠나보내던 흰 팔뚝 위를 개미들이 더러 걸어갔을 것이다 자매들은 치마폭에 담아온 햇살을 다듬으며 쪽파처럼 앉아 있었다. 막내가 소리 내어 일기를 읽으면 반쯤 열린 장롱 문짝이 딱딱하고 네모난 냄새들을 꺼낸다. 엄마의 갑상선이 온도계처럼 정확히 먼지의 체온을 짚어내던 날, 느릅나무의 貧益貧이 창가를 서성인다. 가출 중인 여자애의 언니들에게 금요일이 찾아온다. 교미가 끝난 구름은 흐린 강의 상류에서 느리게 서로를 삼키고 있었다.

 

 

 

 

 

 

 

26.불의 交聲

 

 

 

비가 오고, 사나흘 계속 번지던 산불은 이제 충혈된 눈가를 비빈다. 검은 연기가 길고 잘룩한 벌레집처럼, 찌그러진 대야가 뒷칠 벗겨진 거울처럼 지느러미를 차며 허공을 오른다. 비가 어린 사내애들을 길 바깥쪽으로 끌어당긴다. 완벽한 지도와 함께 하는 여행은 늘 빈한 법. 숲을 다 태우고 비가 먼지불꽃 속에 잠깐 머문다. 상자 하나 가득 이 별의 죽은 바람을 모아도 마음이 내내 허전하다. 서로 엉켜 붙은 불과 숲 모두, 망루에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도마뱀처럼 꼬리를 끊으며 도망치던 스무 살 어느 윤달에, 나는 용한 占집으로, 속을 빨갛게 숯으로 채워 넣은 착한 무당을 만나러 걸어가고 있었다.

 

27. 연혁

 

비가 온 후 10월 17일은 추워졌다. 형과 나는 닭발에 술을 멀고 닭발처럼 외롭게 몸을 굽히며 잠들었다. 10월 15일에 문득 애인이 내 전화를 받았다. 졸리다고, 끊으라고 그녀의 잠이 그녀의 아버지처럼 엄하게 말했다. 73년에 내가 새끼양보다 힘 없을때 태양이 나를 잡아 일으켰다. 파리들이 앉아 있던 도마 위를 부엌칼로 긁고 나서 엄마가 생선내장을 냄비에 풀었다 숲은 방울 모자를 쓰고 마을 반대편의 방앗간으로 걸어갔다. 희망과는 다른 삶이 눈을 비볐다. 내 비밀의 숲에서 부리 큰 새가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빵을 쪼아 먹었다. 엄마는 입데도 대지 않은 찌개를 내가 다 먹고 나서 13년 후에 나와 내 배후(背後)가 후직으로 커피를 마셨다. 보나파르트의 안개의 달에 사람들이 장님처럼 거리를 헤맸다. 이듬해에 내 구두 앞코는 닦아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11월 13일에 나는 증명사진을 찍었고 입사원서를 냈다. 그날 오후엔 애인이 내가 먹은 돈까스 값을 치었다. 1월에, 좁은 학원골목에서 재소생인 친구와 재수생인 내가 만나 헌책방에서 실천이성비판을 샀다. 자장면도 먹었다. 3월 20일에, 식당엔 배부른 사람들만 모여있었다. 6월 장미의 날에 장미 송이를 들고 애인은 다른 남자를 찾아갔다. 내 손이 벙어리 장갑을 끼고 3년전의 지하도 입구로부터 5년 후의 지하도 입구까지 걸어갔다. 89년 8월 29일에 내 절망이 조경가위에 잘려 떨어졌다. 그날 이전에 나는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였고 그날 이후에 나는 지하실이 되었다. 94년 10월 24일 10:00. 지하실, 모든 집들의 심연, 세상이 쥐들을 위주로 유지되었으므로 쥐들은 아무리 나무 기둥을 갉아도 쥐가 되지 않았다

 

28. 빨간 모자

 

날씨 참 더럽다. 보험증을 챙기고, 빨간 모자와 늑대와 할머니는 보건소로 가서 위생업소 정기검진을 받는다. 늑대, 할머니, 빨간 모자. 해마다 이 성가족은 집 안팎을 대청소하고 행복하게 대죄를 빈다. 욕망이 동하지 않는, 내 고향땅이 상기되는 하얀 송곳니로 늑대가 폐경인 할머니를 집어삼킨다. 바람을 밟고 가장 높은 창에 올라가 종을 매달던, 많은 사닥다리를 가진 빨간 모자. 네가 다 자라면 어두운 다락방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귀소본능이 뭔지, 소망이 얼마나 더러운 건지 잘 알게 될거다. 잘 소화되지 않는 불량한 음식인 할머니, 늑대가 담배연기를 불쾌하게 빨아 마신다. 배를 갈라 돌을 집어넣다니, 그건 너무 흉폭하고 너무 당돌한 인간적 죄감. 빨간 모자가 걷는 길은 투망 속 물고기의 외로움 곁에 놓여 있다.

고향의 근친상간을 생각케하는 더러운 날씨, 늑대는 오후 내내 빨간 모자를 기다린다. 할머니는 지금 편히 누워 늑대의 위벽을 머리까지 글어올려 잠드신다. 너무 많은 질투를가진 이상한 아동인 빨간 모자, 따뜻해지고 싶은 어린 시절이 모두 불화의 색깔이었다. 할머니는 왜 무서운 늑대가며을 쓰고 계세요? 이 가면은 지금 너도 하나 쓰고 있질 않니. 함께 노래 부르며 나오던 보건소 앞, 모두가 양성반응, 모두가 사랑과 평화. 더러운 날씨에, 손님도 받지 못하고 빨간 모자가 목마른 지붕 위로 올라가 기저귀 마르는 빨랫줄을 한 번 째, 튕겨본다.

 

 

 

29.구순기

 

 

 

 

30.갈림길

 

 

 

사는 게, 生이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처럼 깊이 박혀 나오는 게, 싫지 않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콜타르 같은 동네에서 갈림길을 줍는다. 그저 낡은 철봉대에 매달려 바람이 거꾸로 세상을 바로보고, 붉은 신호등 켜진 건널목 앞에서 사람들이 계절성 우울을 앓는다. 끝없이 땀 흘리고 달그락거리는 길. 이 길은 아무래도 씨 많은 바람열매가 되려던 것 같기도 하고, 밤과 그늘에게 번갈아 열리는 좋은 돌쩌귀가 되려던 것 같기도 하다.

 

연인의 퍼즐 맞추기가 석양 아래 거진 끝나가는 것이, 뭔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태양은 억새꽃 아래, 굴뚝은 수납장 옆에, 뿌리는 가지 위에, 연인의 손끝이 세상을 하나하나 완성해 간다.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 두고 이제 갈림길과 걸음을 마주했으니 어쩌나, 뒤집힌 무당벌레처럼 擬死하는 하늘, 이 길들 중 어느 쪽을 죽여 붉고 무거운 쪽을 가질 수 있을까.

 

내 불면이 새벽녘에서야 잠깐 귀잠에 드는 것이, 나쁘지 않다. 알약 한 알이 필요한 자가 되거나 지독한 해피엔딩을 꿈꾸는 자가 되거나, 그런 밤엔 있지, 길들이 물에 풀려 수초에 엉키던 강가가 그리워지곤 해. 송충이들이 내 잠에 알을 묻는다. 엄마 닮은 여자애의 꿈을 꾸고 몽정했다.

 

 

 

 

31.진주난봉

 

 

32.해피앤딩

 

 

 

 

 

33.立春부근

 

 

 

그 立春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 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 냄새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위로 머리만 내민 봄볕은 자기를 몰고 어둠 밑으로 순식간에 내려갈 바람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34.斷食

 

 

 

좁고 외로운 방에서 그는 斷食을 말한다. 나무들의 금식,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겨울 숲에서 탈진한 빛들이 가지 밖을 걸어 나왔다. 산 아래서 우리의 외로움은 개미들이 물어다 놓은 흙덩이처럼 흐린 날 쪽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채로 또 잠들었고 더러 택시를 잡아타고 아무 데로나 가고 싶었고 아무 여자하고나 正과 反과 合을 얘기하고 싶엇다. 교문리에 가면 755번 좌석보다 목욕탕 굴뚝이 먼저 하늘로 올라갔다. 배부름과 같거나 비슷해진 말들이 그의 속에서 텅텅 울린다. 열매 대신 애벌레의 집들을 매달던 나무, 그 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같은 내용의 편지를 서로 다른 색깔의 편지지에 적었다. 상징이 사라진 날에 우리는 슬펐지만 살찐 비둘기들은 아름다웠다.

 

 

 

 

 

 

 

35.흑백사진

 

 

 

구멍 좁은 단추의 안쪽이 너에게 마음을 달아준다. 그해 국광의 붉은 빛깔, 자기 무릎에 머리를 대던 어미소의 평화로운 열병, 물옥잠의 구멍난 부레가 모두 바둑돌의 黑과 白이었다. 지천의 꽃들이 허공을 향해 시작되던 하혈도, 네가 빨아들던 담배 끝 새빨간 불꽃도 다만 개의 눈이 바라보던 흑빛 세상.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오빠, 몇 해동안 분갈이 해보지 못한 오빠, 이삿짐 속 허름한 이삿짐이던 오빠,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면 네가 흘린 얼룩들이 고분고부 닦여 나왔다. 대야에 담긴 빨래처럼 누군가 헹궈주기를 바라며 마음이 세제거품 몇 알갱이에 의지해 둥실 떠 있다. 골목마다 칸칸이 놓여 있던 쓰레기통들이 모두 네 고향이던 때, 남루한 밤이 네게 마음을 매달아준다. 한밤 뒷가에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 훗날 애인 얼굴이 나타난대, 기억이 포도알처럼 자주색 피를 쏟으며 달게 터졌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사랑할 운명인가 봐, 수은칠이 반쯤 벗겨진 거울 앞에서 너는 너를 흉내내며 비스듬히 잘린 채 반쯤 웃었다.

 

 

 

 

 

36.모네의 저녁 산책

 

 

 

산책이 시작되는 길 위에서 모드 아침은 세상 밖의 것이 된다. 응달 위에 내린 눈이 따뜻하게 익어갈 때 바람은 魂이 모인 쪽으로 날아가곤 했다. 나는 산기슭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어둠의 입문서를 읽었다.

 

모든 산길의 나무는 浮力을 가진다. 나는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을 불러 여러 번 캐물었다. 아직도 불지 않겠는가, 배후는 누구냐. 날개 없는 나무가 새의 날개 속으로 날아간다. 집으로 가서 빨래들과 함께 잠들고 싶었다. 이방인들이 편히 쉬는 7일째의 날에 나는 옥수수알처럼 노릇노릇 굳어가는 저녁길을 걸었다. 낡은 책 속에서 읽은 밤의 이목구비가 내 앞에서 뚜렷이 깎이고 쉰소리로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공중으로 떠오른 흙과 돌이 나무의 부레 속에서 함께 맴돌았다.

 

간선도로 끝에서 세상의 본을 뜨는 무딘 쇠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결심이 수난史를 쓰고 낙엽이 땅보다 더 밑으로 걸어갔다. 오후는 공원과 도살장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을 만들고, 밤은 그 위에 목탄가루를 뿌렸다.

나는 모래흙 위에 하늘과, 땅과, 집과, 집과 집이 모여 만드는 天地宇宙에 관한 쉬운 이국어의 뜻문자를 썼다. 모드 명료함은 아팠다.

나는 아프게 말했고 누구의 말도 읽지 못했다. 붉은, 푸른, 흰 바람이 먼저 순례하고 간 저녁 산책길은 아이들만 남아서 딱지와 고무줄을 흥정하는 흐린 풍경의 것이었다.

 

 

 

 

 

37. 적, 밋밋한 여닫이문

 

 

38. HighWay Star

 

39. 만화가 소년

 

 

40.교문리

 

 

 

울담에 걸터앉아 우리는 初經처럼 붉게 핀 꽃을 여윈 몸으로 들여다 보았다.이상도 하지, 나무들은 꼭 쥔 주먹처럼 자꾸만 잎새를 끌어당기고 금방 쏟아질 것처럼 공장 아이들은 자꾸만 침을 뱉으며 휘청거렸다.

고요히 누운 비탈길로 우리는 다리 굽은 개를 끌며 올랐다. 나무는 그립고 둥근 덩어리가 되어가고 사람들은 낮아져가는 땅을 또박또박 소리내며 읽었다. 恩者를 만나는 저녁에 우리는 복숭아를 준비하는 꿈을 꾸었다.

 

형이 예고 없이 찾아든 여호와의 증인과 싸우는 동안 삐걱삐걱 좁게 문 열리는 소리가 가슴 아팠다. 선반엔 송화주가 식용유통에담겨 누렇게 변해가고 나는 사과에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듯 벼룩시장에서 구인란을 오려내고 있었다. 나무의 품 안에서 길이 싹을 틔운다. 송홧가루가 뽀얗게 소슨 길에서 내 추억은 자꾸 한눈 팔았다. 눈병이 날지도 몰라,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빌 때마다 세상이 흐릿해져 갔다. 골목엔 지린내로 피어 있는 꽃이 전부였다.

 

 

 

41. 유원지 필담

 

 

 

 

 

 

42. 낡은 장화

 

 

 

방문을 열면 강 밑바닥 물고기의 집들이 明卵처럼 쏟아졌다. 있지요, 맑은 날 보건소에 누워 있는 물고기 비늘들을 보았어요. 벌들이 오전 내내 꿀을 모으고 가뭄 아래 모여 먹은 것들을 토해 집을 만든다. 얘기 좀 해봐요, 당신 손가락은 날카로운 쪽보다 무딘 쪽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요. 내가 어릴 적부터 신어온 낡은 장화, 어젠가 어느 짐승의 따스한 집이었을 가죽끈을 묶는다. 서글픔이 내 발을 조인다. 길 위에서 움츠러들던, 싼 담배를 얻어주던 나를 멈춰 세우던 내 장화. 어디로 갈 건지 얘기 좀 해봐요, 외로울수록 시름은 얼마나 젊어졌던 걸까요, 머리를 빡빡 깎은 아이들이 산 아래 지붕 밑에서 오랫동안 광 낸 구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봉제공장의 털먼지들이 저물녘 하루살이 떼처럼 강변을 오르내린다. 맑시즘의 가장 그리운 문장에 밑줄을 긋고 聖堂으로 가고 싶었다.

 

 

 

 

 

 

 

43.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물의 근원이 라는 뜻을 가진 도시에서 바늘은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걷고 길은 잡음들로 무성했다. 시큼하거나 혹은 알싸하거나, 그늘이 나무 아래서 고두밥처럼 부글거리며 익어간다. 그 흔한 시월의 나무를 따라 걸어도 아픈 말은 흔하지 않았다.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 세상의 끝 어디쯤에선가 번데기들이 평화로운 진자처럼 흔들렸다. 세상을 연민하며 시계들이 일제히 뻐꾸기 소리를 울렸다. 오랫동안 모아온 흠집 난 레코드와 구겨진 수첩은 소리가 만들어 놓을 길을 걷는다. 이별편지 위에 쓰인 내 이름이, 통합공과금 영수증 위에 찍힌 내 이름이 서글퍼 보였다.

 

 

 

 

44. 모래의 시작

 

처음엔 한 술 가득 퍼올려진 따뜻한 고봉밥이었다 흐린 촉 전구알 하나가 뜨거워지는 동안 ㅇㅇ인력 구석 자리에서 감자알들이 식어갔다. 죽은 노래들을 쓸어담던 겨울 벌판이 유리문을 똑똑 두들긴다. 뭐, 가끔씩이라면 할머니같이 쪼글쪼글 웃을 줄 아는 여자애들에게 편지 보내 줄 수도. 방으로 들어와 몸을 털면 언제나 모래 한두 알쯤 따라와 할머니의 잔소리처럼 뒹굴곤 했다. 퇴비처럼 잘디잘게 썰려 삭아가던 ㅇㅇ인력의 소년들. 처음엔 生이 얇은 비닐막 같았고, 다음엔 김 휘휘 도는 찌개그릇 같았고, 나중에 生은 자기 입에 못 담을 험담들이 되어 갔다. 손들이나 발목에 한번 쯤 상처 남겼을 톱날을 챙겨들고 사람들이 ㅇㅇ인력을 나와 톱밥처럼 허공으로 날려간다. 모래 한줌 속에서 큰누나의 잠버릇은 아직도 사랑스럽고 꽃집에 취직해 장미다발 묶는 작은 누나의 보조개는 아직도 깊다. 엄마, 이보다 더 행복한 生은 가짜일 거야. 빚쟁이가 문을 쿵쿵 두들기다 돌아간다. 그런 사람 없다고, 엄마는 문 뒤에서 작고 단단한 모래알로 서걱거렸다. 라라의 테마를 들으며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여러 남편을 둔, 돈이 너무 절박해 엄마 돈을 훔쳤던, 바보 큰누나. 모래알에서 바위로, 물고기 한마리에서 치어로, 왜 시간은 자꾸 거꾸로 헤엄쳤을까. 동글동글 뭉친 주먹밥 같은 태양을 매달고 ㅇㅇ인력에서 일감을 놓친 사람들이 걸어나온다. 처음엔 1.5톤 트럭 브릉대는 엔진 소리에 연정 품었던 잘 감긴 시계태엽이었다.

 

45. 희망

 

46. 몇 개의 길

 

 

 

 

47.그대여 오늘은

 

 

 

그대여 오늘은 차가운 저녁이 거리에 버려지고 진홍빛 이름들이 직할시로 날아간다 오늘은 기념일이지. 사슬 소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오고 가수들은 처방을 기대하지 않으며 노래 부른다. 오늘은 吉日이다. 즐거운 일은 비밀이 되고 뚜렷한 이유없이 처녀들은 군인들 앞을 경보해 지나간다. 새들의 날개가 자꾸 울음 쪽으로 전향해 가는 오늘. 나무들이 가지 위에 새잎을 가지런히 널어 말린다. 친구여 우리는 거리에 피 진홍빛 꽃잎을 보러 나갔다. 오늘은 쿠테타의 날, 모란보다 짙은 피가 더디게 굳어갔다. 침묵이 인솔자도 없이 사람들을 열 맞춰 어디지 모를 곳으로 안내해 간다. 오늘은 밤이 아름다운 날이야. 아픈 자가 아픈 자를 두려워하는 아득한 날이야, 오늘은.

 

 

 

 

48. 충혼탑에의 추억

 

 

 

 

49. 풀밭 위의 식사

 

 

 

너희는 애 안 먹니? 모두들 봉지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우물거리는 사이, 우린 먹을 게 없어요,라고 너무도 선명한 눈으로 아이들이 대답했다. 거미들이 몇 가닥줄에 허기를 매달고 나뭇잎 사이를 떠돈다. 가만가만 울리는 숲의 소리 쪽으로 귀가 오목해진다. 잘 살아가라고, 개암나무가 발 밑의 개암알들을 밟아준다. 아이들은 아카시아 가득한 언덕길에서 웃지도 않고 표정도 없이 술래잡기 놀이에 쓸쓸히 부유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지 위로 올라가 감잎을 쏠고 떫은 뒷맛이 그늘 안에서 흔들린다. 잠에서 돌아오는 입구를 쉽게 기억하기 위해 누구나 잠들기 전엔 잠에게 생채기를 만들어 둔다. 언덕에 누워 당신은 다리가 하나 없는 개의 奇形을 생각했다.

 

 

 

50. 왼발을 저는 미나

 

 

왼발을 저는 미나, 지금 페리호를 타고 3시간 남짓 떠나는

물 위의 어떤 여행, 미나의 허무한 이름들은 늦여름까지 계속

산등성이를 뒤덮는다. 백사장 끝에 서서 미나가 구토한다

깨진 창문은 아름다웠는데, 방 안에 꾹꾹 찍힌 구두 발자국들은

아름다웠는데, 방문을 열면 죽은 미나가 흉한 냄새로 사람을

반기곤 했다. 아무도 네 어린 딸이 울고 있다고 미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두 발의 시

 

 

손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조용히 붙들고 있었다.

 

북쪽 측랑 근처

이모와 함께 작은 여자들은

근대적인 반성을 처음 대했다.

 

이렇게 고양이 수염 같은 발이 달린 나를 좋아해주다니

너희들의 위생도 내 것만큼 얇은 것이고

가방을 열면 청결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게 되겠지.

 

코스모스가 피고 있었다.

서간체 양식으로

인간을 매료시킨 신의 불손

소독, 그리고 인체의 시절

 

착한 사람이며 착한 율법사인 당신

사람이 원하면 그것은 사람으로 나타났다.

네가 남자와 여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신비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거기서 나는 하나의 이름을 듣고 그것을 불렀다. 따뜻한 돌을 안은 변온동물이 먼저 그 이름을 받아 갔다. 더 즐거운 일은 결혼과 출산의 부작용으로 우리의 온도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선물 받지 못한다는 것. 그때 너의 코와 귀에 달린 장신구는 성별이 나뉘고 중성中性을 떠나는 것. 그때 너의 코와 귀에 달린 장신구는 성별이 나뉘고 중성을 떠나는 첫 번째 꿈이 되었다.

 

신체의 여러 이름을 너무 애절하게 바람을 쥐고 있었기에

풀은 자기 냄새를 맡고

사람과 눈 마주치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선행, 그리고 처벌의 시절

 

입구는 빈집에 남아 떠난 것의 무게를 재고 있었다.

하루에 두 끼씩 나는 지옥을 부러워하고

지상의 가장 낮은 층이 내게 보여준 것은

열쇠를 품는 방법

엄마가 낳은 첫 인간에 대한 생각

손을 만든 자의 업적은

떠난 자의 손을 남겨진 자의 손에 붙여주는 것

 

다섯째 날에 그는 바다에게 이별을 낳으라고 명령했다

치솟는 이별

고산병 환자처럼 한 걸음씩 토하고

한 마리가 여러 마리가 될 때까지

치솟는 이별

 

다섯 시간 반을 낙원에서 보낸 사람이 있었다.

그를 위해 낙원은 두 발의 절망을 남겨둔다.

위생, 그리고 모국어의 시절

 

여섯째 날에 맹인 소녀는 월경 자국에게 말한다 ;

속삭이는 말처럼 아래로 걷고 싶어,

내가 만일 건너편에서 부슬부슬 흩어진다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자기 허벅지를 힘주어 걸레질하겠지

 

바람이 검어지는 곳

두벌씩 자판에 가까운 결심

열심히 선고하는 바람을 지켜보는 내게는

검은 손 안에 잔뜩 들어 있는

단지 한 개의 혈액형만 떠오를 뿐이었다.

 

불모지가 있기 때문에

불타는 땅은 그리운 세계가 될 수 있었다.

불모지가 없다면 두 발은 돌아갈 장소라는 의미를 몰랐겠지

다행이다, 불모, 두 발의 위쪽에 달려 있어서

 

 

검은 밤 뒤의 흰 밤 / 조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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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기도 후

아무튼 사과를 깎아 주려는 부모님의 태도와 같이

인간과 밀은

잠깐 지나는 비에 기대어 반성을 했다.

비는 상냥함과 과분함 사이사이에 검고 희게 펼쳐져 있었다.

 

낮은 층에 사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층(下層)의 아이들에게 나는 공군기지였고

비행기였던 아이들은 팔을 벌리고 내 등 위를 달렸다.

동료 같았던 기나긴 이륙

뭐랄까 이제는 신발 끈을 목에 감는 기분으로

아주 천천히 어두워지는 시간에 바늘의 정각을 맞춘다.

 

이사철에만 꿈꾸는 완벽한 집과

멈추지 않는 걸레질은 오랫동안 도돌이표를 나눴다.

세상의 모든 악몽을 그녀들로 편애하는 날

유언 집행인은 또 한 번 죗값의 동화를 읽는다.

결별은 반성의 위치가 될 수 있을까?

아직도 어색한, 사색의 이러한 싸움들.

 

장례식장의 피아노를 결혼식장의 피아노로 옮기기 위해

나쁜 의미로 누구든 네 개의 발을 가지고 태어났다.

저녁이 왔다. 저녁이 네 발로 우리에게 온 것은

저녁의 불운이다.

 

 

검은 밤 뒤의 흰 밤

음악실에서 뺨을 맞고

영원할 것처럼 누르고 있었던 가장 긴 C

 

북서풍의 맛

기껏 밤의 맛으로

흉수들은 특히 내게 다정히 혀를 내밀었다.

말라 가는 침 위에

이제는 내가 당신을 잊고 있다는 바다만이 고요히 남아 있습니다.

천칭자리에 무게가 같지 않은 두 무릎을 대 보는 날

 

‘당신은 긍지 없는 나야’

이런 마음을 전하기 위해

침대는 아름다운 밤이라고 생각한 네 개의 다리 밑에 자꾸 마음을 숨기고

긍지 없는 길에 부스러기 엄마들을 떨어뜨려 주었다.

그걸 줍기 위해 무죄한 소년이 네 발로 땅에 쏟아지고 있었다.

 

조용히 소독되는 기적

머리 먹힌 사마귀의 계절

기도가 충치처럼 흔들리고 있으니

메아리로 돌아오는 내 고백에게 포충망을 걸고

모기약을 뿌릴 테다.

 

 

아니면

밤을 태우고 촛농으로 귀를 빡빡 씻을 테다.

항상 구름을 떠나보내는 건

집사 생활기 속 어디로도 돌지 않는 풍향계 따위

검게 탄 한밤의 심지가 하염없이 하루 위로 돌아오는 것 따위

북서풍의 맛

기껏 밤의 맛으로

천창(天窓)에 깊이가 다른 손가락을 묻는다.

 

버려진 양수책상과 편수책상의 손잡이를 저녁은 처량히도 비틀었다.

몹시도 바깥은 해로워서 온몸에

미리 상처를 발라야 했지, 살 틈에서 들려오는 노래보다

더 넓은 폭의 건반을 이루려고

 

대개는 사라진 것들이 그런 식으로 그립다.

검은건반의 맛

기껏 흰건반이 뒤집힌 맛으로

까마귀와 창밖이 밤새 되새긴 새로운 후회는

계절이 자기들에게 짖고 있다는 것.

 

 

 

 

반복하는 것에 관하여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에 의지해 생각한다. 나는 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고 있지 않은 모습으로 올 것이다. 이곳에 지금처럼 이렇듯 누워 울타리에 관한 책을 쥐고 울타리를 생각하며 오고 있는 나를 생각하듯이, 언젠가는 나도 책을 쥐고 침대에 누워 오후의 빛살 아래 아이들의 소음에 섞여 오고 있는 나와 가고 있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고, 또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장미가 흐르는 계절에 관한 책을 쥐고 언젠가 내가 울타리를 생각하며 침대에 누운 채 가고 있는 나를 생각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오고 있는 내가 또 생각할 때, 오고 있는 나와 가고 있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기 위해 잠시 책을 멈추는 나를 생각할 것이다.

 

결국 타인이라는 페니스를 얻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나, 당신 그리고 다음 작가들과 함께

 

너를 떠난 나에게 나를 떠난 너의 무게를 재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갓난애의 약한 울음소리 같은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종이 위에 적으며 너는 어떤 변신으로 네 얼굴을 닦아 주고프냐? 두 조각난 계절은 변장을 하고 금명일(今明日)에게 눈구멍을 뚫는다.

 

하지만 이것은 눈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합니다. 한쪽 눈에 너무 많은 빛들이 감겨 있군요. 단지 여러 이야기들일 뿐이고, 단지 그것을 한꺼번에 듣기를 원할 뿐입니다. 여동생은 아픈 자기 눈을 보면서 잠들었다.

 

찍힌 한 점에도 기울기가 있는 건

여동생의 이부자리에서 너무 늦게 핏기를 지운 계절 탓이다.

너무 기울어서 쏟아질 게 아주 없는 구름이 피부 아래를 흐른다면

그땐 차라리 심장에게 성기를 꽂을 것이다.

 

봐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잠들기 전의 물결에게로

이대로 감긴 채 영원히

목도리처럼 긴 피가 흐른다.

 

금박 페인트 통 위에 앉아

몰래 낳은 몇 개의 알조차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그녀들의 방법처럼

이것은 나의 동물군(群)

길 잃은 아이들은 남의 엄마를 향해 외쳤어 : 진정? 진정?

 

혼잣말을 거울에 문질러 마모시키면서

연애들은 밤새 모든 물음을 다 갈아 버렸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별과 싸우지 않는 개

 

봐라, 세계가 어떻게 지져지고 있는지. 발길질처럼 너는

이별에 아주 인색한 사람과 만나러 다니고

늘 단답형으로 혼자 외롭게 기저귀를 만진다.

 

처음 듣는 합창의 후렴구가 지우개로부터 들려왔다. 氏는 지워진 글자와 자신을 분별할 수도 혼동할 수도 없었다. 저녁은 이미 잴 수 없는 크기가 된 바람에게 ‘말은 이로부터 올 것이다’라는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풀리지 않는 방정식에 묶어 두는 일의 섭섭함이 이어졌다. 그가 짓밟은 것은 초인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괴물에 불과했다. 氏는 “편지 속의 ‘시(詩)는 신앙가(信仰歌)의 거울에 비쳐진 시간의 변심에 불과하다’라는 문장 가까이로 그가 나를 안내했을 때 나는 그것을 꿈속으로 차 넣고 싶었다.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버려진 양은 누군가의 위로 받고 기분 나쁜 아내가 되리라. 그렇듯 그림자 벌레들은 그림자에 찔려 죽으리라. 그늘진 모퉁이들은 얼마나 슬프게 자신이 꿈꾸어 온 바다의 길흉을 흉내 내며 대지 가까이 흰 배를 뒤집고 떠오르는 것이냐. 노예의 포도여, 상한 이파리로 우리를 치소서. 우리는 아직 우리 병에 깃든 숙주의 기쁨을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타인이라는 모액(母液)을 얻기 위해 나를 짠다.

나, 당신 그리고 다음 작가들과 함께

너에게 이르는 서너 개의 이빨 자국을 청한다.

그래서 우리의 양수(羊水)가 애벌레가 든 빵이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