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박상순] 안개
발비(發飛)
2008. 8. 25. 18:48
안개
박상순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고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안개가 짙
다.
내 어린 낙타는 벌써 잠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집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저녁. 살아
있는 집과 죽은 집, 불 켜진 집과 꺼진 집. 모든 집들이 모여 긴 오징어 다리를 달고 흐느적
흐느적 헤엄치는 흰 물결 속에 잠이 들었다.
저만치 앞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다리에 걸린 얼굴들이 움직인다. 낯익은 젖은 얼굴들, 비에
젖은 낙엽처럼 오징어 다리에 붙어 길바닥을 훑는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몰려온다. 황
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잠들어버렸다.
더 가까이, 익숙한 집들이 몰려와 앞을 막는다. 내가 살던 집과 태어나던 집과...... 혼자 웃던
집과 불태운 집. 몰래 숨긴 집과...... 함께 떠들던 집과 함께 떠난 집...... 함께 구멍을 뚫던
집..... 들이 다 한곳으로 몰려와 앞을 막는다.
수많은 오징어들이 충돌한다, 잠든 내 낙타를 들이박는다. 몰려드는 집들, 젖은 얼굴들, 바닥
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던, 이미 사라진 내 옛집도 달려나온 길위에 굽이치는 흰 물결.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오래전에 잠들고 밤이, 흰 물결 속에서 밤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
다. 내 낙타를 닮은, 죽은 내 낙타를 닮은 젖은 얼굴 하나가 황혼을 품에 안고 뒤돌아,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인생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으며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늘 안개가 짙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