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예민한 슬픔

발비(發飛) 2008. 8. 19. 11:02

 

 

집을 나서면 반도네온의 연주가 깔린 탱고를 듣는다.

전철 안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를 읽는다.

 

" 영화, 기쁨, 성공, 이런 것들은 그 결이 거칠고 그 올도 보통의 것이지만, 슬픔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옥<옥중기> 중에서

 

전철에서 나오자

며칠 내리던 비때문에 하늘도 맑고 바람도 맑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서

쏟아져 내리는 맑은 태양빛은 얼굴로 맞고

스치는 맑은 바람은 손끝으로 맞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밀려 밀려 걸음이 앞으로 놓여졌다.

 

반도네온의 애잔한 음색이 순간 순간 귀 안으로 스며 깊이 스며든다.

귀를 통해 가슴까지 진하게 무거워진 듯 가라앉는다.

 

다시 오스카 와일드의 '슬픔' 에 관한 말이 떠오른다.

슬픔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예민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슬픔이 먼저 일어난다.

역시 가장 예민하다.

맑은 태양과 바람 앞에서 내 몸에서 마음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반응하는 것이 바로 '슬픔'이다.

 

밀어내려고 했던 '슬픔'은

내 안에서 가장 부지런히 나를 반응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신랑을 기다리는 촛불 든 신부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거수일투족을 예민하게 기다렸다가 반응해 주는 것,

그래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디에 놓여지는지 알게 해 주는 선지자와 같은 모습.

 

슬픔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반도네온이 연주하는 탱고를 들으며

짙게 화장을 하고

남자의 다리와 다리 사이에서 쉼없이 오고가던 여자의 다리가 흔들며 춤추던 여자가 새삼 어른 거린다.

 

슬픔은 그렇게 다리와 다리를 오가며...

쉼없이 예민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절정에 다달아 아름다운 춤이라고 불릴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이 아침에

이 아름다운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