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
트랙과 들판의 별
황병승
세련의 핵심
이봐 아가씨 삼촌은 말한다 세련을 알고 있니 몰라요 이세상에 세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우리는 세련을 생각하기 마련이지 특히 공포의 순간에 너는 세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누가 봐도 세련된 것인지 누군가 너의 세련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의 서툰 모습을 얼마나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지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숙제도 너에게 세련을 알게 해주지는 못해 차라리 학교에 가서 세련되게 매를 맞아라 그것이 낡아빠진 작문숙제일 경우에는 더더욱, 이라고 말하는 삼촌의 모습은 너무나도 세련된 것이어서 오늘은 조금도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세련을 말하는 삼촌이 말이다 이것이 세련의 핵심쯤 되는가 보다
도라도라댄스
이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웠던 언니가 있다 언제나 언니를 생각한다 언니를 생각하면 못난 내 이름 내 얼굴 내 눈 내 코 내 입 내 발자국 내 목소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 힘들어지고 만다 못생긴 페이지들 언니를 생각하면 페이지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도는 일 때로는 언덕을 달려 내려가듯 한껏 팔을 벌리고 때로는 죽어가는 고양이처럼 신음하며 때로는 욕조의 더러워진 물처럼, 언니 언니 언니에게 빨려 들어가듯 도라도라 댄스라는 것을 춘다 엄마가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듯 나는 나에게 그것을 한 스텝 한 스텝 가르쳤다
새로운 전자 개
오빠는 처음 보는 것에 사로잡힌다 머릿속의 알파파가 그렇게 시킨다고 한다 어째서 알파파는 우주고 하느님이니까 오빠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것이 오빠의 인생, 전부다 새로운 전자 개 나오면 그것을 보고 만지고 음..... 짧은 결정의 순간을 가진 뒤에 오빠는 그것을 가진다 그리고 버린다 알파파는 언제나 즉각적이고 뉴 전자 도그도 당해낼 수가 없다 알파파는 신이고 생명의 원천이며 불가능한 뉴전자 도그를 향한 끝없는 도전이니까
목수를 섬기는 인생
그러나 아빠의 생각은 다르다 언제나 우리와 다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말한다 네가 내 새끼라니...... 인생은 그런게 아니지 인생은 그런게 아니라니 하루종일 뚝딱거리며 매일 똑같은 소리를 지껄인다 인생은 그런게 아니라고 개집 하나를 지으면서도 아빠는 무엇 때문에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닮아가는것일까 지금도 웃긴데 십년이 지나면 얼마나 웃길 것인가 그것이 비와 바람과 천재지변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인생일지라도
파리채 선생
진짜 인생을 모르는 늙은 노처녀가 있다 그녀가 어떻게 선생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국가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수업이끝나는 즉시 집에 가서 숙제를 하고 불쌍한 부모를 도우라는 식이다 우리는 차라리 학교가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열일곱인데 그것을 표현하기라도 하면 또 등짝으로 파리채가 떨어진다 바보같은 짓이다 우리를 일깨워주기는 커녕 늙은 노처녀 선생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니까 말이다 국가적인 시간낭비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인생관이 너무나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
러브 앤 개년
나의 연인은 말한다 우리가 아침에도 만나고 낮에도 만난다면 우리가 누군인지 내가 누구인지 너는 조금씩 모르게 될 거야 어째서 사랑은 그런 것일까 나의 연인은 말한다 우리가 늦은 밤에도 만나고 새벽에도 만나고 공원에서 들판에서도 만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결국 영원히 모르게 될 것이고 밤과 낮 공원과 들판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어째서 어째서 사랑은 그런 것일까 나의 연인은 소리친다 입 닥쳐 개년아 어째서라니 네가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릴수록 너는 더 미친듯이 사랑에 목말라 해야 하고 이곳에 없는 나를 찾아 밤새도록 공원을 숲 속을 개처럼 헤매게 될 거다 우리가 아침에도 낮에도 공원에서 들판에서 만나나다면 사랑은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일까 나의 연인은 돌아선다 어째서 나를 개년이라고 부르는 네가 누구인지 너에게 개년이라고 불리는 내가 누구인지 또 우리가 무엇인지 너의 말처럼 영원히 모를 수도 어쩌면 조금 알게 될 수도 있을 거다 모르는 거니까 우리들 언젠가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지갑을 훔쳐 과자와 홍차를 사 먹은 적이 있어 그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된다면 우리를 개집에 쳐넣고 혹독하게 매질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밤의 나는 너의 사랑을 받는 개년이다 어쨌든 말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니 네가 누구인지 나의 첫번째 사랑이 어떻게 달아나고 마는지 똑똑히 알게 될 때까지는
누가 새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나
장미의 가시가 어떤 여자의 뺨을 할퀴고 흔들릴 때까지도 엄마는 태어나지 않았다 피가 매어 나오는 상처를 할 일 없는 어떤 남자가 다가와 어루만져주었을 때 엄마는 태어났다 상처를 만져주던 손길은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엄마의 이름은 어쨌든 '한 남자의 손길을 기억하는 , 장미의 가시가 할퀴고 지나간 어떤 여자의 상처'다 내 친구들 중엔 더 긴 이름을 가진 애들도 있다
보는 사람 엄마 엄마 엄마
엄마는 창문에 붙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창밖의 나무가 엄마를 빤히 들여다보고 창밖의 우물이 엄마에게 말하고 창밖의 새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갈 뿐 엄마는 창문에 붙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다정한 멜로디로 응응응, 이라고 흥얼거릴 뿐 귀여운 엄마 엄마는 미운 사람이 아니고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주는 엄마는 아름답다 엄마는 맨들맨들하고 착하고 따듯하고 조용하고 그런데도 엄마는, 빌어먹을 년이다
할머니
파리채 선생이랑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가자! 다림질
언제까지나 풀리지 않는 얘기들 얘기들로 우리는 서로에게 스팀을 뿜는다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다리미와 내 구겨진 셔츠 우리는 서로에게 조용히 스팀을 뿜고 있다 계절은 여름이고 신경질이 나도 소리를 지를 수가 없다 누군가 우리의 작은 창을 걸어 잠갔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의 목소리를 짓누르는 계절이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의 목소리를 짓누르는 계절이기 때문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다림질을 한다 가자 가자 우리는 서로에게 스팀을 뿜어 대고 있다 다리미와 나 구겨진 셔츠 밤을 세워서라도 이 작은 고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있는 거니까
죽음 내 퍼피들
때론 두렵고 때론 지루하다 열일곱 창밖으로 나뭇가지를 들고 가는 언니의 그림자와 내 주위의 모든 것들 구름 비행기 열매 흙냄새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두렵고 지루한 시간 꼬리 치는 내 퍼피들 우리는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친구로서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내 주위의 모든 것들 그러니까 연인 가족 친구 학교 산과 바위 그리고 바위보다 더 단단한 죽은 자들의 목소리에도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친구로서 언니 동생으로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눈물을 감추고 달아나면 끝이다 돌아서면 끝이다 꼬리치는 내 퍼피들 제발 너를 함부로 굴리지 말아 나를 망쳐선 안 돼 너는 고작, 아직 어린애니까
트랙과 들판의 별
나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빠의 새로운 전자 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알파파라니 나 역시 세련을 생각한다 삼촌처럼 할아버지 닮지 않기 위해 빌어먹을 년이 되지 않기 위해 어쩌면 삼촌과는 관계없이 조금 더 세련을 알기 위해 미래는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채로 죽은 언니와 이 곳에 없는 나의 연인을 위해 열심히 트랙을 돌다 들판에 쳐박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쓸모없는 별처럼 미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로잡힌 아빠와날 지 못하는 엄마의 긴 이름을 떠올리며 나는 늙은 노처녀처럼 국가적인 시체처럼 헉헉거리며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나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우리에겐 언제나 우리들만의 승리, 어쨌든 그런 것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굳게 믿으니까 말이다
배척된 채로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그러니 모든 길과 광장은 더러워져도 좋으리
술병과 전단지와 색종이 토사물로 뒤덮여도 좋으리
창가의 먼지 쌓인 석고상은 녹아버려라
거추장스러운 외투와 속옷은 강물에 던져버려라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배척된 채로
배척된 채로
시라고 누가 말했는지...
소설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읽는다는 것을 누가 구분해 놓았는지...
시?
그의 시는 누군가 구분해 놓은 것을 처음 모양으로 돌려놓았다.
삶을 둘러싼 것들은 누가 정해놓았는지...
가족은 누가 결정해놓았는지...
꼭 그래야 한다고 누가 정해놓았는지...
나쁜 *?
그가 시에서 누군가 정해놓은 둘러싼 삶들을 처음 모양으로 돌려놓았다.
중학교 때 800미터 오래 달리기,
달려도 달려도 그 트랙이던,
가도 가도 똑같은 트랙인데,
입에서 거품이 나도록 뛰어야 했던 딱 그 때.... 지금 이 순간.
그를 따라 먼 곳, 긴 여행을 다녀온 지금 숨이 턱에 차지만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긴 하다. 원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