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각혈의 아침
각혈의 아침
이상
사과는 깨끗하고 또 춥고 해서 사과를 먹으면 시려워진다.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지 책상 위에서 하루 종일 색깔을 변치 아니한다 차차로- 둘이 다 시들어간다
먼 사람이 그대로 커다랗다 아니 가까운 사람이 그대로 자그마하다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들의 아니 하나도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 어느쪽도 아니다(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담배 연기의 한 무더기 그 실내에서 나는 긋지 아니한 성냥을 몇 개비고 부러뜨렸다. 그 실내의 연기의 한 무더기 점화되어 나만 남기고 잘도 타나 보다 잉크는 축축하다 연필로 아무렇게나 시커먼 면을 그리면 연필은 종이 위에 흩어진다
레코오드 고랑을 사람이 달린다 거꾸로 달리는 불행한 사람은 나 같기도 하다 멀어지는 음악 소리를 바쁘게 듣고 있나 보다
발을 덮는 여자 구두가 가래를 밟는다 땅에서 빈곤이 묻어온다 받아 써서 통념해야 할 암호 쓸쓸한 초롱불과 우체통 사람들이 수명을 거느리고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뱃 속엔 통신이 잠겨 있다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새 나는 콧속 털을 잡아뽑는다
밤 소란한 정숙 속에서 미래에 실린 기억이 종이처럼 뒤엎어진다
벌써 나는 내 몸을 볼 수 없다 푸른 하늘이 새장 속에 있는 것같이
멀리서 가위가 손가락을 연신 연방 잘라 간다
감고 가느다란 무게가 내 눈구명에 넘쳐 왔는데 나는 그림자와 서로 껴안는 나의 몸뚱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알맹이까지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는 둥
피가 물들기 때문에 여윈다는 말을 듣곤 먹지 않았던 일이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종자는 이제 심어도 나지 않는다고 단정케 하는 사과 겉껍질의 빨간색 그것이다
공기마저 얼어서 나를 못 통하게 한다 뜰을 주형처럼 한 장 한 장 떠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병석에 나는 조심조심 조용히 누워 있노라니까 뜰에 바람이 불어서 무엇인가 떼굴떼굴 굴려지고 있는 그런 낌새가 보였다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별을 진단한다
가브리엘 천사균(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치고)
이 살균제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담이었다(고?)
폐 속에 뺑끼칠한 십자가가 날이면 날마다 발돋움을 한다
폐 속엔 요리사 천사가 있어서 때때로 소변을 본단 말이다
나에 대해 달력의 숫자는 차츰차츰 줄어든다
네온사인은 쌕소폰같이 야위었다
그리고 나의 정맥은 휘파람같이 야위었다
하얀 천사가 나의 폐에 가벼이 노크한다
황혼 같은 폐 속에서는 고요히 물이 끓고 있다
고무 전선을 끌어다가 성 베드로가 도청을 한다
그리곤 세 번이나 천사를 보고 나는 모른다고 한다
그때 닭이 홰를 친다- 어엇 끓는 물을 엎지르면 야단 야단
봄이 와서 따스한 건 지구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랭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나무들조차 끓어서 푸른 거품을 자꾸 뿜어내고 있는데도
-1933. 1. 20
'각혈의 아침'
그를 따라 가래낀, 바람소리 빠지는 기침을 해본다.
그를 따라 가끔 피묻어나는 기침을 해본다.
그를 따라 아무도 없는 차가운 방에 누워본다.
아침이다.
세상은 잠을 깬다.
새소리도 들린다.
두부 장수가 울리는 두부종소리가 들린다.
들창너머로 햇살도 들어온다.
그에겐 아침이 없다.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사과가 말라간다.
겉 껍질이 쪼글거린다.
하지만 그 껍질을 벗기면 아직은 육질에서 단물이 하얗게 배어나온 사과이다.
그는 사과에게서조차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것,
썩어가는 육체.
검은 피.
거칠게 이는 바람.
소용이 없는 것들, 안에서 부터 밖으로 썩어가는 것들.
사과에게서조차 열등한 자신을 두고 보는 것이다.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열등의 극치이다.
사과를 보면서 자신의 증상들을 일일이 되짚는다.
얼마나 자신이 처절한지, 얼마나 자신이 바닥인지, 읊조린다.
난 아무 것도 먹지 못한다.
내가 듣는 것은 음의 길을 잃어버린다.
손이 잘려버려 이제 시를 쓸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그렁거리는 호흡을 하면서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자신의 고통들을 차가운? 건조한? 멀리? 두고 읊조린다.
고통스러워야 한다.
더 많이 아파야한다.
머리를 바닥에 쳐박아 아무것도 보이지 들리지 않는 띵한 회색빛 고통을 느껴야 한다.
그때야 인간은 삶을 저 멀리 두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육체적고통까지 세상의 몫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이 후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지 않는다.
선을 넘어야 한다.
바닥에 머리를 찧는 고통 이후의 일어날 세상의 고통, 나의 고통일 경우보다 훨씬 견디기 쉽다.
너 대신 내가 아파준다.
바람들은 기침을 하면서 내 몰리는 끓어오르는 피,
나와 세상의 고통과의 교환이다.
각혈,
거래의 성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아침을 받아들이려면,
그 만큼은 아파야 한다.
아직은 그만큼 되려면 먼 길을 가야한다.
불행해져야한다.
불우해져야한다.
더추워야한다.
모두로부터격리되어야한다.
그처럼 내안에서 잃어나는 들끓음을 밖으로 각혈해버리려면... 그래야 한다.
봄이 와서 따스한 건 지구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랭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나무들조차 끓어서 푸른 거품을 자꾸 뿜어내고 있는데도
헌책방에서 고른 이상의 시선집.
오아시스없는 사막에서 주운 나침반. 나침반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