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생각한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생각한다
복효근
내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 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빛나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惻隱之心.
사랑의 마음 중 가장 오래가는 마음이 측은지심이라했다.
특별히 좋아할 구석이 없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치자.
시인의 말처럼 그가 슬프기에 그를 사랑한다치자.
그가 햇빛 가득한 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거라치자.
그를 사랑한 것은 환한 웃음이 아니라,
그의 슬픈 눈언저리, 입언저리 때문이라치자.
그에게 무엇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치자.
다만, 내가 그가 몰래 숨어 우는 자리에 피어난 작고 하얀 꽃 한송이라고 치자.
그가 자신의 원대로 되지 않아 억울해하며 간혹 씩씩거리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곳에 내가 있다치자.
눈두덩 비비며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 가려고 애쓰며 자리를 털며 일어날 때
그가 우연히 발견한 작고 하얀 꽃 한 송이이라고 치자.
그가 자신의 발 옆에 핀 나를 더 잘 보기 위해 눈을 비빌 것이라고 치자.
그렁한 눈에 흐리게 보이는 나를,
눈을 비벼 환하게 다시 보일 나를, 보았다 치자.
그가 내게 웃음 지으며 한 번쯤 나의 얼굴을 툭 친 뒤, 자신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났다치자.
난 뒤에서 보고 싶을 뿐이라고 치자.
그는 몇 걸음을 걸은 뒤, 다시 한 번쯤 나를 돌아보았다치자.
그럼......
바람에 흔들리듯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일 것이다.
난 그가 슬플 때 그를 사랑한다.
햇빛 아래서 당당한, 바람 앞에서 당당한, 세상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그를
하얗게 핀 작은 들꽃은 만날 길이 없다.
그런 그는 들꽃에겐 이미 사랑하는 당신이 아닌 것이다.
그가 당당해지는 날,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그가 모든 것 앞에서 환하게 웃기를 바란다.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가 슬프기 때문이다.
슬픔은 가슴이 비어 나는 바람소리이다.
난 그의 슬픔에 손을 올려 그의 평화로움을 위해.....만파식적을 분다.
복효근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시.
작년 가을에 복효근의 시를 처음 만나 시집들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시를 모아 '원해서' 라는 나만의 시집을 만들었더랬다. 손 안에 들어가는 크기라 전철에서 읽기에 안성맞춤이었지.
오늘 아침 좀 밝고 따뜻한 시가 읽고 싶었다.
이 책을 골라 들고 전철을 탔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있던 이 시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