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조양래]서정시인

발비(發飛) 2006. 10. 26. 10:58

서정시인

 

조양래

 


난 염세주의자,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눈

난 베짱이, 환상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단풍

난 어린 미혼모, 가을날의 맑고 푸른 하늘

난 시한부의 환자, 우수수 단풍잎을 날리는 바람

난 거리의 청소부, 찬바람에 흐느끼는 전깃줄

난 빈민가로 나 앉은 일가의 가장,

난 거기에 거기에 제빛을 찾은 석양의 붉은 뺨

 

시인의 눈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봅니다.

 

바람이 부는 곳

단풍나무가 물들어가는 곳

맑고 푸른 하늘

바람에 단풍잎 떨어지는 곳

거리의 전깃줄

빈민가

석양을 마주하고 선 시인

 

지금은 제대로 가을입니다.

서정시인은 가을 한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한 행마다 서정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린 인간의 눈이 머뭅니다.

 

서정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이 지금 현관밖에 있습니다.

가을임을, 그냥 보낼 것이 없는 가을임을 서정시인의 눈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서정시인 덕분으로 우린 보지 못할 뻔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의 두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보는 사람의 눈 깊이 만큼 보인다는 것, 세상에 서정시인들이 살아서 참 좋습니다.

  

다시 한 번,

비파나무님 감사합니다.

제겐 그림같은 시였습니다.

 

박수근화백님의 '고목과 행인(1960)'입니다. 아마 서정시인은 여기 어디 앉거나 서 있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이 생각났고, 시인에게 자리하나를 마련해 두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