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거림

배낭

발비(發飛) 2006. 5. 11. 02:04

배낭을 챙기고 싶다.

 

주머니 여럿 달린 배낭을 챙겨들고,

그것 하나만 들고 그에게서 떠나고 싶다.

 

앞주머니 옆주머니엔 배낭을 매고서도 뒤로 손을 뻗어 잡을 기억들을 넣는다.

차표사는 법,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당장 필요한 것?

 

가운데 가장 큰 주머니엔 아주 오랜 동안 꺼낼 필요 없는 기억들을

소리도 냄새도 밖으로 배어나오지 않도록  비닐팩에 담아 넣어둔다.

영원히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그 위엔 ......

 

.......

......

......

 

배낭을 챙기고 싶었다.

 

아니,

 

생각이 바꼈다.

배낭을 버리기로 했다.

 

그에 관한 모든 것, 시간에 묶인 모든 것을 배낭에 순서없이 끌어담는다.

자크를 닫고 여행용 자물쇠로 배낭을 잠근다.

 

낯선 섬으로 향하는 배의 뒷머리에 서 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내 머리위로 날면,

그 때 난 배낭을 던져버린다.

 

갈매기와 함께 ......배낭은 먼데로 떠날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더라도

그가 없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 가벼워서 어디로든 날 수 있는.

 

배낭에 모두 담아,

배낭을 버리고,

배낭과는 절대 다시 만나지 ......

 

배낭없이 아주 먼데로 여행을 떠난다.

배낭도 없이 아주 먼데로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는....

나 같은 어떤 이는 ....

먼데 여행을 떠나며 배낭없이 가야하는 사람도 있다.

 

배낭을 챙겨 그에게서 떠나는 것이 아니란다.

배낭에 그를 담아 그를 버리는 것이란다.

나만 남는 것이란다.

 

배낭은 나의 완전범죄를 위해 깊이 깊이 가라앉아야 할 것이다.

물거품 몇 방울은 허락할 용의가 있다.

 

다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겨울은 무성영화처럼

-시네마 서울

 

조현석

 

얼은 손 바지주머니에 찔러넣고 둘러보는,

갈 곳을 갑자기 잃어버리는 驛前 광장

흐린 등불 밑 눈을 찡그리던 공공화장실 옆

자정무려브 시린 속을 채우는 1분 컵라면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김을 흔드는 기적

메아리지며 출발을 재촉하는데

 

산이 낮아지고 강이 멈추어버릴 야간열차

하행선 얼어붙은 어둠 위를 달리며

혀 끝을 찌를 살얼음의 양배추와

잇몸을 흔들 케첩 뒤섞인 햄버거를 삼키는

너는, 그림자로만 남아 성긴 눈을 맞고 있는

나를 볼 수 없다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시내버스 막차가 닿는 곳

환멸의 눈보라가 밤새 끊이질 않는,

네가 떠난 후 서울 변두리는 회색 툰드라지대

한밤 내내 몸살 앓는 산 울음소리에 몸 뒤트는

 

먼지 낀 세상 너머, 금간 유리창 사이

어렴풋이 드러난 바람부는 바깥세상 한귀퉁이에

떨고 설 나조차도 흔들리며 내려가는 너를

다신 불러들일 수 없다

하루 종일 입에 맴돌듯 매달린 내 사랑 내 곁에

없다, 이젠 서로의 다른 미래가

끝모를 곳으로 나란하게 펼쳐지리라

 

톱밥난로 타들어가는 불빛 흐린 삼류극장

겨울비 내리는 無聲 흑백영화처럼

나른하게 시간은 흘러 조용히 끝나고

아무런 기억없이, 기약한 봄이 와도

 

 

조현석시인이 시, 겨울 무성영화처럼'에서 내가 필요했던 것은

 

나른하게 시간은 흘로 조용히 끝나고

아무런 기억 없이, 기약한 봄이 와도

 

두행이다.

시의 앞... 시인의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내겐 아무 기억없이 내년 봄을 맞아야 한다.

난 아무 기억없이 내년 봄을 맞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배낭을 버리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