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에드바르드 뭉크]뭉크 뭉크

발비(發飛) 2006. 1. 21. 00:46

 

 

[뭉크 뭉크]

 

에드바르드 뭉크

다빈치 출간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개질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 by 뭉크 -

 

 

 

에드바르드 뭉크

 

여러 화가들 중 나의 경우를 본다면, 가장 편견을 심하게 가지고 있었던 화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맨 처음 뭉크를 접한 것, 그것은 그림으로 접한 것이 아니라 이름으로 접했다.

뭉크!

참 희한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접한 그림. '절규'

화가의 이름과 그림이 어찌 그리 잘 어울리던지. 틀림없는 정신병자야.

 

-결국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위대한 예술가치고 약간의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그들의 작품들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이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좀 떨어져 있기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진실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의 정신질환을 담보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몰입한 세상- 가장 근접해서 본 세상을 우린 구경할 수 있다.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절규'

 

하늘과 물과 섬은 곡선, 흔들림이다

그것위에 놓은 다리는 곧디곧은 직선 끝도 없이 뻗어있다.

相衝한다. 서로 부딪힌다. 그 안에 선 사람이 온 몸을 뒤틀며 절규한다.

그렇게 절규해 본 적이 없는가? 없다고?

속으로 한 적도 없는가? 없다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가? 없다고?

절규하는 사람을 보며 시원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없다고?

그럼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그런 사람과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 전 부터 그의 그림이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다.

많은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본 것은 거의 후반기의 작품이였을 뿐인데, 보고 싶었다.

불안함의 극치를 달리는 그의 그림들

 

 

-잠시 딴 소리-

 

뭉크의 그림에서 주는 불안감은 고흐의 그림에서 주는 불안감과는 다르다.

 그건,

고흐의 그림에서 주는 불안감은 작은 돛단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사람의 불안감이라면,

 뭉크의 불안감은 작은 돛단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흔들리는 배안에서 차오르는 바닷물에 발이 잠기는 그런 불안감으로 느껴진다.

그저 나의 마음대로 이해한다면.... 

희한하게도 고흐는 젊은 나이에 자살을 하고,

뭉크는 81세까지 살았다.

 

-잠시 딴 소리 끝-

 

 

 

책을 읽다가도 아니면 생각을 하다가도 뭉크가 그린 사람들의 눈이 보고 싶었다.

사실 그는 눈을 제대로 그리지 않은 화가인데도 말이다. 그의 눈은 점 하나이다.

이 책은 작년에 나온 책이다.

그냥 충동적으로 사두었었는데 그리고 읽지도 않았었는데, 그저 그림만 열어보았었는데....

며칠 전부터 읽어나갔다.

그의 불안의 근원이 궁금했었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금세기 최고의 불안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읽었다.

 

이 책은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역자가 뭉크 연구가가 쓴 뭉크의 전기를 대략 요약 정리한 부분

두번째는 뭉크의 일기, 편지, 짧은 메모 형식의 글들

세번째는 뭉크가 남긴 우화

 

개인적으로 '다빈치' 출판사의 미술시리즈를 좋아한다. 일단 쉽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저 천천히 따라 읽어나가면 된다.

그저 어떤 해석도 없이, 해설도 없이 뭉크 그 자신이 쓴 글로 되어있으니까..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셈이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 편지를 읽는 것, 그것만으로도 흥미있는 일인데, 예술가의 일기임에야...

우리와 어떤 다른 삶을 살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가는지..

그들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개인의 정서적 바탕색위에 그림을 그려내는 것, 그림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간에 바탕색을 깔고 시작하는 것 그래서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이고 특별한 것에서 발견하는 보편성이랄까? 삶이라는 것이 그런거니까....

 

그의 불안의 근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덮어둔 채 그냥 어른이 된 뒤,

그림이라는 예술쟝르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상처는 파헤져지고 불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것은 죽음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두 살 위 누이의 죽음.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끝없이 그를 지배했던 것은 누이의 죽음일 것이다.

소녀의 죽음시리즈는 유화 판화 데생할 것 없이 무수한 작품으로 그려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떨치지 못하는 죽음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로 그는 그의 누이의 죽음을 추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병든 누이의 판화를 여러 색으로 여러 느낌으로 추적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가 굉장히 자신에 충실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판화였다.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색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죽음을 맞은 사람의 색은 어떤 것인지를

판화를 통해서 끝까지 찾아가는 뭉크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가족의 죽음을 되새긴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에 색을 입힌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일임에도 스스로 견디어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피해가지 않았다.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간간히 '절규'같은 그림을 그림으로서 자신을 털어냄으로 힘을 얻고

다시 자신을 거슬러 추적해나가지 않았을까한다.

그의 그림이 모두 '절규'의 기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절규는 토해내는 것이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이 그림 '질투'처럼 관찰자 방관자로서 침묵하는 뭉크가 더 많음을 알게 되었다.

뭉크에게는 희노애락이 숨겨진다.

그가 좋아했을 것 같은 여인과 다른 남자의 다정한 장면을 등을 돌리고 있는 커다란 얼굴

그 얼굴이 가진 침묵이 두 사람을 압도하는 듯 하다.

 

 

 

 

 

 

'사춘기' 왼쪽의 그림은 1893년, 오른쪽 그림은 1914년에 그린 것이다.

20년이 넘은 시간을 흘러 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 사춘기소녀를 보는 그의 시각이 드러난다.

 

서른살에 보는 사춘기 여자아이의 모습-두려움이 베인 눈, 여자가 되어가는 몸, 부끄러움

쉰살이 보는 사춘기 여자 아이의 모습- 인상파화가의 이미지, 검고 크게 드리워진 그림자, 움직이는 배경

 

유난히 그는 같은 그림을 많다.

그것은 판화 작품을 많이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좀 전의 이야기대로

풀리지않는 자신의 실타래를 집요하게 풀어나가는 의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소재나 제재를 통해서 자신의 변화를 파악하기보다는

같은 것을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그 점은 그의 그림을 보는 나로서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사람은 늙어감에 따라 어떤 시각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

자기 자신에 대해 몰두해가는 것이 깊어짐에 따라 어떤 변화가 있는지

그럴 경우에 선택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마 이 책을 사서 글을 읽기보다는 그림을 보느라 몇 달을 지낸 것도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웠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던 부분은 그의 글이다.

그는 화가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기로 정신병자였던 화가.

하지만 그의 정신병력이 다른 예술가에 비해 그리 심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도 말했다시피, 그저 공기가 좋고, 편안하게 쉬려고 하는 정도로 정신병원을 생각했으니까...

그 곳을 괴로워하지 않았던 듯 싶다. 그의 편지글을 보면....

그런 그가 우화라고 해야 하나, 어른을 위한 동화정도.. 아무튼 그런 류의 이야기를 자신의 판화와 함께 썼다.

 

자유도시의 사랑

 

재미있었다. 한마디로 웃기고 황당한 이야기지만, 그 주제는 무지 선명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이 자유로운 곳에서 자유에 구속되는 이야기, 진정한 자유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 하기를 좋은 작품은 작품을 보고 난 뒤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작품이라고 했었는데 이 이야기가 그랬다.

 

알파와 오메가

 

이건 아담과 이브를 모티브로 쓰고 그린 이야기다, 인류의 발전사라고 해야하나?

뭉크라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시각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무지 생각을 많이 한 사람, 그는 사람들에게 정신질환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스스로 늘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았지만, 세상을 보려는 그의 노력은 끝없이 포기하지 않았음을 그의 글 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의 그림들 중 맘에 드는 것으로 몇 장을 골랐다.

 

너무나 힘찬 그림들.

이 그림과 '절규' 나 '마돈나'를 같이 두고 본다면...

나처럼 문외한인 사람은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시기적으로도 그가 절규를 그린 뒤에 그린 것이다.

그는 그가 생을 유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을 택한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이 올때면 그림 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그가 에너지가 넘쳐서 뭔가 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르면,

그동안 어떻게 그렸는가에 상관하지 않고 그 맘이 시키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주위는 모두 그저 주변일 뿐이다, 오직 말만이 힘차게 달린다.

 

소나무를 보라, 저 멀리 수많은 집들과 사람들이 살고 있겠지만, 한 그루 소나무가 그것 모두 보다 우뚝하고 선명히 서있다.

 

노란 통나무 숲 사이에 곧게 벌목된 통나무가 그 시작과 끝이 소통되고 있다.

나무의 처음으로 들어가면 세상의 끝과 편안히 만날 것 같다.

 

(책을 찍은 것이라.. 너무 흐리다. 그래도 그대로 쓰고 싶다. 내가 본 것 그대로)

 

 

'키스'라는 그림이다.

뭉크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없다. 아니 하나로 뭉개졌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었는데,

그가 사랑이라는 것에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꿈을 가졌다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그림을 보고 나서이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루어졌을 때, 완전한 사랑이나 올인하는 사랑을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하지 못했으므로 꿈꿀 수 있었고, 이상을 가졌다.

 

키스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둘이 둘이 아닌 것, 아무 생각도 없는 것.. 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딱 저 그림처럼

눈도 코도 입도  너도 나도 없이 그냥 뭉개져버린 모습을 그려내는 화가가 뭉크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의 자화상...

난 이 자화상을 보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잘 극복하고 사느라 수고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그의 판화를 더이상 찍지 못하도록 , 그리고 그의 모든 그림을 오슬로에 기증했다.

팔리지 않아서도 있겠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은 화가였다.

그는 분명하게 세상을 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삶을 연장해가는지 자신을 판단하고, 자신에게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서 신이 주신 명을 다하고 살았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가 그린 '절규'나 '마돈나'는 그의 한 부분이다.

대표작일 뿐 그의 삶 전체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