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오규원] 그 여자 외

발비(發飛) 2005. 11. 15. 10:38
LONG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순례1

 

강강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오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죽고 난 뒤의 팬티

 

 

가벼운 교통 사고로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와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 지 아닌 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운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罪)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사랑의 기교(技巧) 1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게 당신을 사랑해 하며
    아양을 떨고,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버스가 다니는 길과 버스 속의 구린내와
    길이 오른쪽으로 굽을 때 너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훔치는 한 사내의 부도덕(不道德)에게
    사랑의 법(法)을 묻는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취하는 법(法)을 소주에게 묻는다.
    어리석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취해야만 법(法)에 통한다는 사실과
    취하는 법(法)이 기교(技巧)라는 사실과
    기교(技巧)가 법(法)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안하게도 술집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취해서 깨닫는다.

    내가 사는 법(法)과 내가 사랑하는 법(法)을
    낡아빠진 술상에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깨닫는다.
    젓가락은 둘이라서
    장단이 맞지만,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법(法)은 하나뿐이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장단은 엉망이다.

    강(江) 건너 마을에는 후정화(後庭花) 노랫가락이
    높고
    밤에도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좌석 밑의 구린내와 지린내를 사랑하고
    상녀(商女)는 망국한을 몰라
    노랫소리가 갈수록 유창해진다.*

    나는 이 곳의 기교파(技巧派)로 울면서, 이 울음으로
    몇 푼의 동냥이라도 얻어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여기 이렇게 울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 상녀부지망국한(商女不知亡國恨)
    격강유창후정화(隔江猶唱後庭花)
                 ―두목(杜牧)

    /오규원 시집, 사랑의 기교, 민음사, 1978/


ARTICLE

    난, 여자,

    난 내가 생각하기에도, 천상 여자,

     

    나를 뺀 천상여자인 여자는 어찌 살고 있는가?

    천상여자들은 천상여자처럼 산다.

    노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뒷머리 가지런히 묶고.... 가족들의 쉼터가 되는 삶을 살더라.

    내가 느끼는 천상여자들은 평화로운 여자들이다.

     

    그럼 난, 감잡았겠지만,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좀 있고, 그저 둥둥 떠다닌다.

    떠다니다 걸리는 것 있으면 떠들고,

    걸리는 것 없으면 "에고 내 팔자야.. 걸리는 것도 없냐" 그러면서 또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난 천상여자다.

    옷 만드는 것 좋아하고, 뜨게질도 좋아하고, 예쁜 것도 좋아하고... 그러니 난 천상여자다.

     

    여기 또 천상여자들이 줄을 서있다.

    내가 아는 앞치마두르고 행복해하는 그런 천상여자말고...

    나 닮은 천상여자들이다.

    난 이여자들을 보면서, 내가 천상여자야? 하고 의심했던 것을 거둔다.

    이 여자들이 천상여자라고 느끼는 걸 보면 나도 의심없이 천상여자다.

    난 내가 천상여자였으면 좋겠다.

     

    "넌 천상여자야"

     

    그 말은 마치 내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축복같은 말이다.

     

     

     

    저 여자 


    오 규 원

    좁은 난장의 길을 오가며 한 시간씩이나
    곳곳을 기웃거리는 저 여자
    월남치마를 입고 빨간 스웨터를 걸치고
    한 손에 손지갑을 들고 한 손으로
    아이들의 내복을 하나하나 들었다 놓았다 하며
    이마에 땀을 흘리는 저 여자
    시금치 한 단을 달랑 들고 그냥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저 여자
    임신복을 둘러입고 배를 디룩거리며 정육점의
    돼지갈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저 여자
    돼지갈비집에서 얻은 뼈다귀를 재빨리 비닐 봉지에
    쓸어담아 뒤돌아보며 가는 저 여자
    양장점 앞을 피해가는 저 여자
    청바지를 입고 맨발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발뒤꿈치가 새까맣게 보이는 저 여자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눈을 내리깔고
    순대를 먹고 있는 저 여자
    한 귀퉁이에 서서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듯
    초조하게 먼 하늘을 보고 있는 저 여자
    질퍽거리는 난장의 길 위로 타이탄 트럭에
    싸구려 화분을 잔뜩 싣고 온 꽃장수의
    치자꽃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척 척 향기를
    사방으로 풍기는
    흐린 어느 봄날

    ...............저 여자

     

    위에 있는 저 여자와 아래에 있는 그 여자의 사이에 있다.

    두 여자는 참 다르다.

    다른 두 여자를 시인은 보여준다.

    내 안에 저 두 여자는 당연히 같이 있다.

    그렇지만, 부등호를 그 사이에 둬야한다면, 어느 쪽에 입을 벌리게 할 것인가?

    타고난 것대로 하는거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넌, 나에게 어떤 모습이 보고 싶니?

    넌, 내가 어떤 모습일 때 이쁘니?

    그렇게 물어본다. 내 옆에 있었던 사람에게

    혹은 저거, 혹은 그거

    내 옆에 있었던 사람들의 수만큼 난 저거와 그거를 반복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여자이면서부터 내 옆에 단 한사람만 있었다면, 그거 아니면 저거였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난 단 한사람만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거 이기도 하고 저거이기도 한 이유다.

    앞으로도 난 그거 아니면 저거일 것이다.

    왜 그거나 저거를 정하지 않냐고?

    난 그거와 저거가 다 좋거든... 정말 다 좋은데. 그래서 어쩌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꺼내주는 것 같거든.

    때로 힘들지만, 멀미나지만,

    그거이기도 하고 저거이기도 한 난 항상 다시 살아가는 느낌이다.

     

    둘 다 능숙하지 못한 게 문제이지만......

     

     

    그 여자

     

     

    거울 속에, 그 여자는 구두를 벗고

    거울 속에, 그 여자는 침대 위에 던져 놓은 스타킹을 그대로 두고

    거울 속에, 그여자는 흐린 별을 보던 창을 두고

    거울 속에, 별에 녹아버린 눈동자를 그냥 두고

    그 여자는 , 거울 속에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두고

    연기 한 줄기 두고

    그 여자는, 거울 속에 꽃병에 시든 꽃을 그대로 두고

    거울 속에, 그 여자는 마른 눈물을 화장대 위 손수건 사이에 두고

     

    그 여자는 사라졌다

    아득히 거울밖으로

     

    한 잎의 女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詩集 같은 女子,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여자는 참 이쁘다.

    그런데 여자를 女子라고 하면 이쁜 이미지보다는 슬픈이미지가 더 강하다.

    처음 이 여자를 그냥 한글로 '여자'로 두들였다가 다시 한자 女子로 변환을 했다.

    시인의 여자는 이뻐서 손잡고 가방들어주며 어깨감싸주며 그렇게 사랑해주는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여자는 멀찌기서 女子를 보며,

    '너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거니?'하고 속엣말을 할 것 같은

    시인의 옆에 있는 여자가 아니라 맘에만 품고 있는 그런 女子일 것 같다.

    여자도 시인을 알 것이다.

    저 어딘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눈을 내리까는 女子...

    시인의 여자는 그런 여자다.

    시인은 그런 여자를 사랑한단다.

     

    한 잎의 女子 2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女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女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女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女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女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女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女子, 아이는 하나 꼭 낳고 싶다는 女子, 더러 멍청해지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女子 3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빛나고 있네. 난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같은 女子, 그레뉼같은 女子, 모카골드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바 같은 女子, 잎이 세 걔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있네. 그녀도 앉아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오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다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김현에게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 묻은
    자식의 옷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헹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때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 죽을 쑤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는
    사내의 그것을 만진다 그 손은
    그렇다----언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