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일기
어제는
하루인데, 며칠 같았고... 또 몇 사람 같았습니다.
첫번째
비가 오는 날은 소리가 크게 들린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때문에 말소리도 안 들리고, 말 소리가 안 들리면, 짜증이 나고
큰 소리로 이야기 할 때는 절대 웃는 표정이 되지 못한다.
미간을 찡그리고 말하게 된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는 지는 모르고, 상대가 그런 표정인 것만 싫다.
"왜 이렇게 화를 내며 살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다가. 퇴근시간이 다 되어 거울을 보고 알았습니다.
화장을 한 얼굴에 미간사이로 화장이 밀린 것을 보고서야
오늘 종일 얼마나 인상을 쓰고 있었는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다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다.
내 코앞에 거울 하나를 달고 다녔으면 했습니다.
나를 본 사람들은 나때문에 얼마나 꿀꿀했을까? 이 날씨처럼..
그렇게 소리와 전쟁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두번째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 약속이 있는데,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면 안될까요?
5시에 나가야 할 일이 있는데... 죄송해요..."
선선히 그러라고 말씀하신다. 아싸~~~
너무 좋았다.
한 시간 빠른 퇴근에 발걸음이 날 듯이 가볍다.
사실 저녁 7시30분에 친구 생일 모임이 있다.
근처에서 모이는 까닭에 시간이 어정쩡한데,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비는 시간에 한 건을 하자 싶었다.
날도 좋은데... 비오는데... 맘껏 분위기 잡아보자 싶었다.
덕수궁미술관
"피카소에서 백남준까지" 그 곳에 가고 싶었다.
분명 이 비때문에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너무 환상적이다.
날 듯이 전철을 타고 시청역.
그리고 덕수궁... 역시 비오는 날이라 텅빈 궁궐이다. 이렇게 텅빈 궁궐
사실 덕수궁은 어느 옛날에 가보고, 너무너무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조차 없다.
그냥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텅 빈 궁궐을 가로질러, 그 이상 분위기의 궁궐을 가로질러...
미술관으로 ....
좋았다.
사진촬영금지.....문화인으로 지켜야만 한다.
그런데 내가 그 그림들과 함께 있는 것을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음모를 꾸민다.
디카의 후레쉬를 껐다.
그리고 몰래 한 컷을 찍었다..... 어디선가 나타났다. 도우미왈 "촬영은 안됩니다."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아래 디카를 넣었다.
그리고 몰래 또 한 컷을 찍었다...... 안 들켰다.
사방을 살핀다. 도우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다. 얼굴들을 얼른 찍었다.....또 안 들켰다, 고 생각했다. 들켰다.
이제 포기한다.
그즈음 난 비디오아트방에 가있었다.
멋졌다. 사실 추상화쪽보다는 그 쪽이 좋았다.
알 수 없는 붓질...
그것보다는 내가 보고 있었던 익숙한 것들이 만나서 이루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아예 전시실 바닥에 앉아서 몇 작품을 보고 또 보았다.
행복했다. 빠져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 공간에 내가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 곳에서 두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세번째
어둑어둑해 질 무렵의 덕수궁
음악을 듣는다.
전인권 3집 (난 너무 좋다... 특히 날개)을 듣는다.
빈 덕수궁에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비 갠 직후의 하늘을 찍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있었고, 나무가 있었고, 덕수궁지붕들이 있었고, 빌딩들의 꼭대기가 있었다.
너무나 다른 것들이 하늘에 있었다.
난 그 하늘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것도 서울의 하늘을 보면서 감동받은 적은 처음인 듯하다.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사연많은 하늘이었다.
해질녘 난 그 곳을 맘껏 휘젓고 다녔다. 누군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혼자 노래부르며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이런 날, 이런 날씨에 누군가와 함께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나도 사회적동물이었군!!!!
네번째
친구의 생일모임이다.
산을 같이 다니는 친구들인데, 사실 친구가 아니라, 나이 어린 이도 있고, 나이 많은 이도 있다.
그 모임을 좋아한다.
아주 편안한 모임이다. 그리고 유일한 모임이다.
그곳에 가면, 난 떠들고 웃고 마시고 논다. 그것도 잘 논다.
거기서 내가 아니어서 나이기도 하고, 나여서 내가 아니기도 한 그런 나와 만난다.
무조건 노는 자리.
잘 보여야 할 사람도 없고, 내가 고민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필요도 들려줄 필요도 없이
오직 그냥 놀기만 하면 된다. 맘껏... 좋다.
자청비...21도
그런데 이건 속임수다.
소주와 도수가 비슷한데 맛은 산사춘과 비슷하다. 마셨다.
야구장에 갔다. 처음으로 500원짜리 넣고 맞히는 야구장에 갔다.
1000원어치를 해 보았다.
밖에서 보기에 공은 작아보였는데, 그래서 맞칠 수 있을까 했지만, ㅎㅎ
철문을 들어가면서 생각했지.
'절대 눈을 감지 말고, 똑바로 보자... 덤벼라... 이걸 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공이 내게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맞추었다.
아마 8할은 되는 듯 싶었다.
모두 파울이었지만, 그래도 난 공을 끝까지 보았다.
좀 연습하면, 날아도 가겠지?
공이 내게로 날아오던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날아와라. 그것이 공이든 다른 것이든 끝까지 봐야한다. 다시 내게서 멀어질 때까지 봐야한다.
좀 더 놀다가 집으로 왔다
다섯째
전철이 창동역까지 밖에 운행을 하지 않는다.
걸어야 한다.
택시를 타도 되지만, 빈털털이...ㅎㅎ, 걷고 싶었다.
위험하다고 그러지만, 난 걷는 것을 무지 좋아한다.
걸었다. 40분정도. 아주 천천히 중랑천을 가로지르면, 가로등 비치는 물빛을 보고.
쏜살같이 달리는 차들을 보고, 깊이 잠든 촉촉한 은행나무도 보고,
난 아마 조금 흔들리며 걸었을 것이다.
다시 음악을 듣는다.
이번에는 조용한 것으로...Josh globan의 노래를 들었다.
비는 그쳤는데, 그 습함이 내 눈으로 옮겨 앉는다.
그냥 눈물은 나지 않는데 촉촉하다.
땅과 나무와 길과 다리와 나. 공평하게 촉촉해졌다. 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좋았다.
절대 삼투압은 일어나지 않는다.
혹 내가 촉촉해진것은 이미 삼투압이 진행된 후라 그런가?
그렇게 걸어 걸어 집으로....
여섯째
잤다. 푹 잤다. 긴 하루를 저장했다.
어제의 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