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발비(發飛) 2005. 5. 12. 10:56

-우리들의 양식-

 

이성부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

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

거기 모인 구리빛 건강의 힘을 점지한다.

톱날에 잘려지는 베니어의 纖細,

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한다 잘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을 몰아쥐고

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흥 나는 도무지 엉터리 손발이고,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함마소리, 자갈을 나르는 아낙네가 십여명.

몇 사람의 남자는 철근을 정돈한다.

순박하고 땀에 물든 사람들,

힘을 사랑하고 배운일을 경멸하는 사람들,

저녁상과 젊은 아내가 당신들을 기다린다.

일찍 돌아간다고 당신들은 뱉어내며

그러나 어딘가 거쳐서 헤어지는

그 허술한 공복.

어쩌면 번쩍이는 누우런 연애

거기엔, 입들이 살아있고 천재가 살아있다.

아직은 숙달되지 못한 나의 음주

나도 또한 제와처럼 돌아갈 것이다

늦도록 잠을 잃고 기다리던 내 아니

문밖에 나와 서 있는 그 사람,

비틀거리며 내 방에 이르면

구석어딘가에 저녁이 죽어있다

아아 내 톱날에 잘려지는 외국산 나무들,

외롭게 잘려서, 얼굴에 내놓는 김치, 깍뚜기,

차고 미끄러운 된장국 시간.

베니어는 잘려 나가고

무거운 내 머리, 어제 읽은 페이지가 잘려나간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활자들도 하나씩 기어서 달아나는

뒹구는 낱말, 그 밥알들을 나는 먹겠지.

상을 몰리고 건방진 책을 읽기 위하여

나는 잠시 아내를 멀리하면

바람이 차네요 그만 주무세요

퍽 언짢은 자색 이불속에서 누워

아내는 몇 번 몸을 뒤채지만

젊은 아내여, 내가 들고 오는 도시락의 무게를

구멍난 내 바지가랭이의 시대를

그러나 나는 읽고 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철 공, 십여명 아낙네, 스스로의 해방이 사라진 뒤

빈 공사장에 녹슨 서풍이 불어올 때

나도 일어서서 가야 한다면

계절은 몰래 와서 잠자고, 미움의 짙은 때가 쌓이고

돌아볼 아무런 역사마저 사라진다

목에 흰 손수건을 두른 저 거리의 일꾼들

담배를 피워 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의 일부, 시민의 일부.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나간다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간과 시는 아니 시대와 시는 이렇게 맞물려가는 것이다.

1967년 그 아득히 오랜 시간전에는

유서깊은 현장까지도 베니아 합판으로 공사를 했을 것이다

아주 건방진 노가다는 밤에는 건방진 책으로 머리를 채우고,

낮이면 공사판엘 다니며, 매일 확인할 것이다.

책은 얼마나 건방지며,

세상은 얼마나 비천한 것인지.

둘 사이를 오가는 이 건방진 시인은,

어느 한 곳에만 터잡고 있는 자줏빛 이불을 덮은 아내와 함께 있지 않는다.

아내가 해 준 도시락과 끼니를 먹으면서....

모두들 엇나가는 세상이다.

엇나가는 것들은

붙어있지 못하고 돌면 돌 수록 떨어져나간다.

엇나가는 것들을 붙잡고 돌아가면 돌아갈 수록 엇나간것들은  점점 엇나간다.

마치 투포환처럼,

저 멀리 저 멀리로 각각의 길을 간다

베니아와 유서깊은 역사현장이 그렇고

건방진 밤과 노가다판의 낮이 그렇고

밥해주는 아내와 책 읽는 시인이 그렇고.

어느 순간 하늘에 떠 있는 별들처럼 산산히 흩어질 것이다.

흩어지는 날,

그들은 반짝일 것이다.

흩어지는 날

그들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흩어지는 날, 우주라는 한 이름으로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엇나가서 붙어있어서 폭발을 기다리는 ...

아슬람.

손을 놓아야 하는 용기...

누군가 빙빙 돌려서 날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