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話者
話者
허연
던져주는 먹이를 붙잡고 전투적으로 배를 불린 동물원 사자의 허탈한 눈빛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이 있다. 혼자서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노인을 본 적이 있다. 바로 그 침묵의 순간, 사자와 노인은 방금 전 끝난 욕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화자가 되어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욕망의 화자(話者)가 되어야 하는 건 지나친 형벌이다.
욕망이 침묵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밥을 먹고나서 문득 밥이 객관화될 때, 사랑이 몇 번의 호르몬 변화와 싸움질로 객관화될 때, 욕망이 남긴 책임이 나를 불러 세우는 순간이 온다.
숙연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저 여자도 두 시간쯤 전에 시리얼로 밥을 먹었을 것이고, 열 시간쯤 전에는 사랑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조용히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배가 고파서 먹었을 뿐이었어.
허겁지겁 먹었던 것은, 그건, 그것도, 배가 고파서였던거야.
배고프도록 버틴 시간때문이었던 거잖아.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지만, 배가 고플 땐 원래 그러거잖아.
사자처럼, 시인처럼, 길거리 포장마차 혹은 김밥천국에서 떡볶이를 먹는 사람처럼 원래 그런거잖아.
수저를 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는 순간부터 의식이 되는, 나. 너. 그들.
책임, 그렇지 책임이지.
책임을 지는 시간이 언제나 필요하지,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것 까지야.
하지만 인정할게 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몰랐을지도.
허기를 달래는 일에도 책임을 지는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냅킨으로 입을 닦는,
그 책임의 시간과 같은 시간, 사랑이 끝난 뒤.
서로의 손에 들린 티슈를 바라보는 시간.
혹은 아무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
혹은 서로의 등을 보는 시간,
냄킨의 시간보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침묵의 시간.
책임의 시간,
말하는 자도 자기의 말을 삼키고, 듣는 자도 들은 말을 삼키는 시간,
가끔 길에서 우연히 맞닥드린 낯선 사람과 짧은 사랑을 한다.
침국의 시간도 책임의 시간도 짧은 거리의 사랑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은 밥과 같은 짧은 거리의 사랑
아무 것도 아닌 밥 한 그릇이, 길에서 만난 짧은 사랑이 아주 오래도록 혼잣말을 하게 된다.
아무 것도 아닌 밥이고, 나눠먹은 사랑인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