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시청에서 필경사?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컴퓨터가 막 나왔던 시기라 시청의 주민등록대장, 지적대장은 모두 수기로 작성되어야 했던 때이다.
나는 글자를 옮겨 쓰는 일을 한 것이니, 말그대로 필경사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이텍포인트, 그 수성펜으로 한글과 한자를 정자로 쓰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은 제법 괜찮았지만, 당시로서는 모던타임즈의 찰리채플린 같다고 생각했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잘도 썼다.
패기 넘쳤을 스물두살, 그때의 나는 속이 터졌겠지만, 어쨌든 잘 견뎠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머릿속에는 언제나 공상 상상의 세계였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했었다.
상상 공상이 넘치고, 말이 넘치면...,
점심시간이고 일이 마치는 시간마다 뭔가를 썼다.
그것으로 무아지경이었던 것 같다.
남들이 오해할만한 일도 하였다.
나랑은 일곱학번 선배임에도 어찌저찌하여 우리랑 같이 학교를 다녔던 과선배가 있었다.
완전 어른이었던 선배, 나는 그 선배를 무척이나 따랐다.
좋아한거냐고 물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의 감정의 정체를 모르므로...모른다고 대답한다.
아무튼 내가 시청에서 열심히 글자를 쓰고 있을때
그 선배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일하는 날이면 매일매일 편지를 썼다.
잠시 쉬는 시간이건, 점심시간이건 어떻게든 편지를 써서 퇴근길마다 그 편지를 부쳤다.
나중에 그 선배가 결혼소식을 알려왔다.
그 때도 내 마음이 어떤지 알수는 없었지만, 편지가 생각나
내 편지들 모두 주세요 그랬다.
그런데, 말이지, 그 선배는 결혼 준비를 하면서 그 편지를 모두 없앴다고 했다.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그저 말을 했을 뿐이고, 말을 할 상대가 필요했을 따름이었을텐데,
그 선배는 내가 자기를 좋아해서 편지를 보낸줄로 알았나보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럴만하지.
난 상식적이지 않았고 말이지.
화를 냈다.
왜 태웠냐고.. 내가 좋아했으면 좋아한다고 말했겠지.
분명 다른 말들만 잔뜩 있는 편지를 왜 태우냐고, 진짜 좋아하면 그렇게 많이 보냈겠냐고,
나는 그 선배가 나의 차고 넘치는 말들을 모두 저장해줄 줄로 생각했던거다.
지금도 그 편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나의 스물두살에 차고 넘쳤을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다행히도 남은 것도 있다.
그 선배에게만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김상,
내가 당시에 따랐던 여자선배,
아무튼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혼자서 생각을 하다가 넘치면 무조건 편지를 썼다.
지적대장 복사를 한 이면지에 언제나 급하게 편지의 글씨들은 펄펄 날랐다.
그때
나는 고요하고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오늘 아침 [기획회의]라는 출판잡지를 보다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라는 책이 인용되어 나왔다.
책이 아니라 말이 기억났다.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은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다.
그래서 기다리길 잘 하는 어른이다.
편지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그때 무지하게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쓴 편지는 거의 답장이 없었다.
나는 매일 두세통의 편지를 썼으므로 아무도 내게 그 답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답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허공에다 말을 하는 것처럼, 대답없는 것에 익숙하다.
내가 한 것은 내가 한 것일 뿐이니,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간혹 대답을 들으면, 그것은 그가 나를 의식했을 뿐이라는... 생각을 그때도 분명히 하였다.
언제나 대상이 없는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한 것이다.
좀 더 살면서,
내가 생각하건데, 대답이 없음에 아무 반응하지 않는 것이 기다림과 같은 뜻은 분명 아니지만,
남들은 대답이 없는 시간에 대답을 꼭 기다리므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나를 기다리길 잘한다고 표현한다.
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는 잘 기다리는 것이 된다.
말이 되나?
그래서 사람들은 참을성이 많다고도 하고, 근성이 있다고도 한다.
나는 어쩌면 상대를 묵살하고 내 페이스대로만 가는 것인데 말이지.
그런데 말이지.
그런 나는 꽤 매력적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내 페이스대로 움직이는데, 그것이 나이를 꽤 먹어도 컬러를 가지는 사람일 수 있었는데 말이지.
지금 나는 나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제 나는 기다리지 못한다.
스케줄대로 움직이고, 스케줄대로 움직이려면 나는 트레일러 위에 올려진 트랜지스터 라이오가 되어야 한다.
그건 니 사정이고!
이 치명적인 말과 뜻을 옆구리에 의식을 하고 살아야 하는 어른이라니...
햇빛이 쫙 비치는 빈의자에 그림자놀이를 하며 기다리는 것도 잘하고, 가만히 있는 것도 잘 하고,
빈 자리를 쳐다보며 그 자리에 앉았으면 좋을 누구 누구에 관한 생각도 많이 하고,
차고 넘치면 빈자리 주인에게 편지를 우왕우왕 써대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답이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수박씨를 땅에 뱉어놓고 싹이 올라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려도,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그저 땅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처마밑으로 비가 내려, 땅이 패기 시작하면 반가운, 패기 시작한 땅에 물길이 생기고, 어느 물길과 만나게 될까
그것이 어떤 스릴러 보다 더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볼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때쯤, 하이쿠 두세줄 꿰어 쓸 수 있다면, 스물두살과는 다른 어른이 된 거겠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좋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