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최승자] 보따리장수의 달

발비(發飛) 2010. 1. 21. 13:04

보따리장수의 달

 

최승자

 

시간 속에서 시간의 앞뒤에서

흘러가지도 않았고 다만 주저앉아 있었을 뿐

日月도 歷史도 다만 시간 속에서

 

나는 다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을 뿐

 

먼 길 보따리장수의 달

흰 하늘 눈 먼 설원(雪原)

보따리장수의 달만 흘러간다

 

흰 하늘 눈 먼 설원(雪原)

 

가도가도

흰 하늘 눈먼 설원(雪原)

 

 

신문을 보다가 최승자 시인이 11년만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을 내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새 시집 중에 마음에 걸린 시이다.

 

참 오래간만에 소리내어서 읽어보고 싶은 시였다.

저절로 소리를 내어 읽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다가..

 

흰 하늘 눈 먼 설원

흰 하늘 눈 먼 설원

하고 자꾸 말하다보면 가슴이 텅 비는 느낌이다.

뭔가 사라지는가하면,

텅 비는가 하면,

바람 소리가 쉥하는 가면,

그 가운데 앉아있다.

몸 주위를 바람이 싼다.

 

사방 막힌 방에서...

 

이어 시집의 다른 시 한 편이 연이어 떠오른다.

먼 방, 빈 방

 

 

먼 방 빈 방

 

빈 방에서

저 먼, 없는 폭포 소리를 듣는다

 

(먼지는 내가 빈 방을 만들어냈고

빈 방이 저 먼, 없는 폭포 소리를 만들어냈다)

 

먼 방 빈 방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폭포 소리는 흘러내리는데

 

호젓이 고즈넉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먼 방. 빈 방

 

나는 마치 시인인 듯, 독자인 듯...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시인이 만들어놓은 방으로 마치 내 방인 듯 앉았다.

 

이 진한 것,

진함은 고립을 만든다.

시인의 진함이 고립을 만들었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진함이 있어... 한 편의 시에 낯설음도 없이 시인의 방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내 진함.

혹은 탁함.

 

반갑다..

아주 오랜만에 삶의 진함을 만났으며,

고립을 만났으며,

 

누구였던가...

쟝 그르니에가 말했다.

 

고통은 언어를 만나서 사라진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