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황지우] 뼈 아픈 후회

발비(發飛) 2008. 6. 3. 11:24
LONG
허수아비
 
황지우
 
-옷걸이
 
장판 바닥에 떨어진 담뱃재를 침 묻힌 손끝으로
집어올리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조심해야겠다
고 속으로 경계심부터 품었던 일
구긴 파지를 휴지통에 롱 슛, 그 결과로 곧 닥칠
일을 점치던 버릇
지하철 마지막 계단의 홀.짝수에 연연하던 것
신문에 난 의학 상식의 정도로 스스로 중병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에 가던 겁
속이 미싱미싱할 때 손가락을 넣어 토해버리듯
요즘 나는 넘어 올 것 같은 예감들을 미리
게워버린다
시를 쓰다가도 나도 모르게 나오는 불길한 예시는
지운다, 부음란도 이제 덤덤하게 읽는다
이 모든게, 좀 엉뚱하긴 하지만,
내 마음 속 애인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른 마음들에게 시집가고 없는 탓일 게다
추근덕 거리는 개에게, '저리가' 하고 한 것 외엔
종일 한마디도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다
짚으로 싼 목인,
누군가 내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아
휙 돌아봤더기
내 모자, 내 웃옷, 내 바지를 입은 옷걸이였다
왜 죄지은 것처럼 그리 놀랐을꼬
내 옷을 입고 있던 그 자, 어디로 갔을꼬
 
신 벗고 들어가는 곳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픔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가,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던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물고기 그림자
 
황지우
 
맑은 물 아래
물고기는 간데없고
물고기 그림자들만 모래 바닥에 가라앉아 있네
잡아묵세, 잡아묵세
마음이 잠깐 움직이는 사이에
물고기 그림자도 간 데 없네
눈 들어 대밭 속을 보니
초록 햇살을 걸러 받는 저 깊은 곳,
뭐랄까, 말하자면 어떤
신성 같은 것이 거주한다 할까
바람은 댓잎새 몇 떨어뜨려
맑은 모래 바닥 위
물고기 그림자들 다시 겹쳐놓고,
고기야, 너도 나타나거라
안 잡아묵을텡께, 고기야
너 쪼까보자
맑은 물가 풀잎들이 심란하게 흔들리고
풀잎들 위 풀잎들 그림자, 흔들리네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을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
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을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네 눈 속에 연꽃은 없었다
보광의 거품인 양
눈꼽 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 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 타는 게,
게좌에 앉네
 
 
 
 
 
 
 
 
 
 
 
 
 
 
ARTICLE

뼈 아픈 후회

 

황지우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 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알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아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