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대로 詩

[조현석] 5월, 봄과 여름 사이

발비(發飛) 2008. 5. 31. 02:22

 5월, 봄과 여름 사이

 

조현석

 

1.

이층에서 삼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쯤

멈출 수 있는 두세 평 공간

황사 낀 유리창 너머

봄이 가고 있다 피곤하고 아련하게

옅은 초록에서 점점 짙고 푸르게 멍이 들어가는

시선 끝의 작은 산들과

건물 가까이 서 있는 온 몸이 멍자국뿐인 나무들

 

2.

어스름 속으로 숨어들어갈 즈음

소리도 없이

검붉은 피멍의 새 한 마리 날아간다

 

잠시 눈길을 떼었다가 다시 보아도

아직 그 자리인 듯 푸드덕거리며, 계속 날아간다

허공에 떠 있는 네 고통과 구슬픈 울음소리마저

그 날개짓으로 털어버리는 게 맞다

 

눈 깜박이는 순간마다 망막 안에 남는

하늘을 껴안아도 그냥 떠도는 먼지

안 보이는 점 하나일 뿐

흐려진 잔상들이 검푸른 도화지 위헤

마구잡이로 섞여버리는

 

3.

그래 봄, 짧디짧은 봄일뿐

한순간 참았다 한꺼번에 성질내듯 핀 꽃들

피멍든 새가 푸드득푸드득 날아가는 동안

여름은 꽃을 피우는 깊고 깊었던 고통 따윈 몰라

 

 

 

 

시인은 '한 순간 참았다 한꺼번에 성질내듯 핀 꽃들'에 눈길이 간 것일까?

아님, '여름은 꽃을 피우는 깊고 깊었던 고통 따윈몰라'에 눈길을 두는 것일까?

 

 

-잠시 딴 소리-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오직 어제의 슬픈 생각만이 다시 나를 찾아옵니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슬픔의 표현입니다.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 줍니다."

 

-27세 슈베르트 일기 중에서/1824

 

 

 

창 앞에 섰다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멀리... 창에서도 더 멀리...

참 멀리도 서있다.

 

'푸르게 멍이 들어가는 시선 끝의 작은 산'을 보고

'검붉은 피멍의 새 한 마리 '를 보고

'떠도는 먼지 안 보이는 점 하나'를 보고

 

'한순간 참았다 한꺼번에 성질내듯 핀 꽃들'피는 5월,  봄과 여름 사이에

그 반대의 것들만 보고있네.

 

  '한 순간 참았다 한꺼번에 성질내듯 핀 꽃들'

 

이 한 줄이 참 좋다.

23행의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에서 이 한 줄만이 유일하게 도드라진다.

온통 흑백세상에 홀로 선명한 색을 지닌...

꽃, 혹은 시인

 

 나 혹은  꽃?

생각만으로 좋다.

 

한 순간을 접으니... 세상의 색에 묻혀버린 흑백이다가

한 순간을 또 접으니.. 흑백인 세상에 홀로 색을 지닌... 꽃이 되었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