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 문학사상
이건 연쇄작용이다.
그저께 본 '화려한 휴가'때문이지.
아침에 출근하면서 습관적으로 한 권씩 뽑아드는 시집, 오늘은 정희성시인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를 들었다.
시간이 정말 뒤로뒤로... 정말 뒤로뒤로...
그걸 원했는지 모를 일이다.
지옥 같았을 그때가 지금보다 더 나았을리 만무한데,
시간을 뒤로 뒤로 뒤로....자꾸 뒤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 흐르는 것은 물뿐이 아니었다.
살아보니, 흐르는 것은 물보다 더 많은 것들이며, 가끔 흘러넘치는 물보다 더 많은 것들이 흘러넘치며,
우린 흘러넘치는 것들의 가에 앉아 흘러넘치는 것들을 구경한다.
무엇인가 흘러넘치는 것 같은데....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사람이 넘친다.
사람들이 꿀떡꿀떡 넘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제방을 넘치는 물처럼 사람을 할퀴고 갈 뿐, 나를 길러내고 자라게 하고 살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옆을 지나며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내 손을 잡아끌며 함께 가자고 하는 사람들
내가 손을 내밀며 우리, 우리하고 물길 향하듯 향하게 되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은 흘러가면 갈수록, 삶의 하구로 가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꿀떡꿀떡 넘친다.
하지만 말이다
사람 넘치는 제방에 앉아 삽을 씻게 된다.
하루를 먹게 한 삽을 사람들에게 씻고는 걸터앉아 담배 하나를 피우며 바라보게 되는 사람의 물
어디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어디 흐르는 것이 사람뿐이랴.
제방에 삽을 걸쳐두고 담배를 피고 있는 나도 흐르는..... 나를 질질 흘리는
흘러 넘치는 것들 사이에서 끼어 닳고 닳아 말개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툭툭 털며 일어나는
노동의 저녁.
전철역 2번 출구 앞 훼밀리마트의 턱에 앉아 삽자루 대신 커다란 가방을 누이고 앉았다.
불빛들을 단 차들은 줄 지어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 위를 사람들을 둥둥 떠내려가는데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둥둥 떠내려가는데 하얀 달이 떴다.
노래방 간판 위로 쳐진 네줄 전선 줄 사이로 하얗고 둥근 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 저렇게 부풀어 올랐는지... 팽팽한 달을 보다. 달빛에 반짝이는 삽자루 대신 든 가방의 쇠단추 반짝이고....
달빛은 내게 그렇게 작은 쇠단추로 오고.
아직도 달빛 너머는 사람들이 꿀꿀 넘치는 아스팔트 강물이 흐른다.
그래 나는 너와 같아서 아스팔트 길로 흐르는 강물 위에 둥둥 떠 흘러가다
꿀꿀 넘쳐 제방을 넘어
지하철 2번출구 앞에 턱에 걸려 표류 중이다.
흐르는 물에 씻긴 삽자루, 달빛에 반짝이는 가방의 쇠단추를 끼로
먹을 것이 없는 빈 집으로 어두워 돌아가려한다.
삽자루에, 가방에 붙은 것이 없는 .... 빈 것인
둥둥 떠다니다
흐르다. 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