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식] 땡볕
문학의 적이라니. ‘문학이란 뭔가’라는 질문 같다. 그래야 문학의 적이 전면에 드러날 테니까. 게다가 나는 10여 년간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거나 않았던 전력이 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내게 문학은 기쁨과 기록 사이에 있었다고 가까스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기쁨은 순수했고 기록은 불순했다, 기쁨은 가능한 거이었고 기록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기쁨과 기록을 포기하게 만든 게 바로 내 문학의 적이 아니었을까
기쁨은 황홀경으로 나타났었다. 뇌를 금가게 하는 한줄기 섬광이 번쩍거릴 때 그랬다. 고개 숙여 마침표 하나 찍는 순간이라고 느꼈는데 집 밖에서 신문 떨어지는 소리와 일 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소리가 들릴 때 그러했다. 도박이 시간을 마약으로 변모(보들레르)시킨다고 했던가. 시간이 농축돼 엑기스 한 점을 현현할 때 기뻤다. 그 기쁨을 만끽할 땐 시를 위해 순교도 가능하다는 낭만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기쁨을 앗아간 적은 밑바닥을 드러낸 재능이었다. 재능이란, 없는 재능을 쥐어짜는 열정의 다른 이름. 열정의 미달은 열정으로써만 덮어쓰기가 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었다.
열정이 한순간에 식어버린 건 내가 내 시의 형식을 만들지 못했으며, 만들지 못하리라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내 시는 표절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몰입과 열반의 기쁨이 마구 방해 받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밥벌이를 하면서는 재능에 대한 자의식마저 희박해졌다. 이것 역시 얄팍한 재능에 대한 잡아뗄 수 없는 증거다. 돌아서 눈 감으니 청춘의 8할을 묻어둔 곳이 그토록 쉽게 잊힐 줄이야.
왜 다시 쓰는가. 새로운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일단 눈앞의 적군 한 명을 물리친 형국이다. 이제와 다시 생각하니 쓰는 게 재능이고, 쓰는 과정이 재능이었다. 릴케가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일할 때의 에피소드. “재능이란 무엇입니까?” 로댕은 간명하게 말했다.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천하의 로댕과 릴케에게도 ‘작업, 작업, 작업.’ 이 재능의 동의어인 것을.
믿기로 했다. 시는 재능으로 쓰는 게 아니라 쓰는 행위 자체가 재능이라고. 열정이 작업의 아들이지 그 역은 아니라고, 지난 10여년 기자질을 하면서 남 이야기만 하다가 이제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즐겁다고. 그 시적 성취야 비참한 수준이지만 일단 내 글을 내 맘대로 쓴다는 게 기쁘다고. 그랬더니 황홀경이 예전에 비해 빈도는 현저히 줄었으나 강도는 만만치 않게 찾아오더라고.
그러나 시간이 좀 흘러 시 쓰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나의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진다면 모를 일이다. 또 다시 재능에 대해 절망하게 될는지.
시를 통해 나와 시대를 기록하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미래를 포기한 채 삶과 생활과 세상을 얕잡아 보던 청춘 시절의 시론이었다. 기록으로서의 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겠다. 다만 아무 말 못한 채 앞으로 할 말 다 하겠다는 느낌은 든다.
내 시의 적은 바로 시를 쓰고 생각하는 절대시간의 감소였다. 재능과 열정은 작업시간에 비례한다. 작업시간의 확보를 위해 생활을 조절하는 용기와 절제야말로 내 시의 적을 물리칠 무기라고 생각한다.
땡볕
김중식
태양을 집어삼키고 싶다
해발 육천사백 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아픈 사람을 살리는 것은 죄라고 우겼으므로
사람들은 나를 그냥 냅뒀고
그렇게 외롭고 또 고독했던
불구의 봄날을 지나
지금은 그대의 향기에 일사병 걸린듯
오 감탄사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吳모여인이여
피안을 핥던 발정난 개가
네 냄새를 좇아서 네 치마폭까지 물게 되었다
참고 참았지만 기어이 참지 못했다
뱀의 피처럼 차가운 이성을 더 차갑게 식히려 했지만
죄짓지 않고는 내 피가 미칠 것 같다
땡볕 아래서 나는 지금 혼자다
여인의 직감이 맞는 거라면
오늘밤 너는 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일출은 핏빛일 것이다
이 시인은 뉘일까요?
며칠 전 우연히 들른 블로그에서 발견한 '행복하게...'라는 시를 만나고는 당장에 시집을 샀다.
93년에 초판이 나오고 06년 11쇄 ....
그 앞도 뒤도 없는 딱 한 권의 시집이다.
마치
학교 때 최인훈의 광장, 구운몽, 태풍... 들에 푹 빠져 있으면서 그 분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묘하게 이 시인에게 그런 느낌을 받는다.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일까?
판권도 이제사 확인해 보았고,
더는 검색도 하지 않았고... 그저 난 그의 시를 읽기만 했다.
이 시인은 뉘일까요? 라는 물음은 한동안 접으려 한다.
뱀의 피처럼 차가운 이성을 더 차갑게 식히려 했지만
죄짓지 않고는 내 피가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
며칠 전 난 생각했다.
내가 움직이는 곳을 중심으로 악의 기운이 돌고 있을 것 같다는 ...
그러므로 난 악의 축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
이때의 악은 악함의 악이기도 하고, 추함의 악이기도 하고, 미움의 악이기도 하고, 외면의 악이기도 하다.
난 내가 움직이는 반경의 것들에게서 좋은 기운이 돌기를 항상 바란다.
그런데 말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 사방을 보면 ..... 말하고 싶지 않다.
땡볕 아래서 나는 지금 혼자다
난 가끔 혼자여야 한다고 우기기도 한다.
땡볕아래서 내게 솟아오르는 기운을 말려 버려야 한다.
................
이 시인이 위험하게 느껴진다.
이 시인도 어쩌면 악의 축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시를 읽게 되면서부터 난 부정적 발언을 계속하는 것이지?
왜 그의 시를 읽게 된 후부터 온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이지?
그의 시를 읽으면서부터 내 안에 꾹꾹 눌러두었던 '악- 내가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 자꾸 돋아난다.
즐기고 싶다.
한동안 눌러 두었던 내 안의 '악'의 기운을, '독'의 기운을 품어내고 싶다.
아마 뱀도 그럴 것이다.
독을 품어내고 싶지 않아 독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지금의 나처럼
독을 온통 세상에 쏟아 내고서야 그 열을 식히고 차가운 몸으로 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난 내 안의 독을 품어내고 싶어 ... 싶어...
그럼 내일은 어쩌라는 것이지.
내일 아침 이 시집을 들고 출근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한다. 그래야만 한다.
지금 돋아나는 나를 누르고 덮어두어야만 한다.
숨막혀 죽도록 - 질식사!
그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