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주인 김군은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를 따 먹으라고 문자를 보냈었다.
나한테만 보낸 것이 아니라 텃밭의 1번, 2번, 3번 그리고 나 4번에게 모두 보낸 것 같았다.
그 문자를 받고도 아무도 안 따갔는지, 보리수 나무가 휘도록 빨간 열매가 늘어갔고,
보리수 나무 아래는 동백꽃이 떨어진 것처럼 빨갛다.
뒷산에 올라가 부엽토를 한 포대 긁어와 어제 심은 여름 상추에 옆에 살포시 덮어주고,
투과율이 50%인 차광막을 사방 말뚝을 박아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텃밭주인 김군과 긴 나무 틀밥을 함께 만들면서,
만난지 겨우 몇 달이지만 제법 합이 잘 맞음에 감탄했고,
그 틀밥에 흙을 채우고, 균형을 맞추고 ...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가 오다가 해가 쨍하다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 날씨에
게다가 세상 모두가 쉰다는 일요일에
나는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흙노동을 했다.
물론 몇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텃밭 주인이 2번 세입자밭에서 서리한 오이, 3번 세입자에게 서리한 고추, 본인의 밭에서 가져온 상추와 고등어통조림을 따서 차린 맛난 점심을 먹었다.
더는 노동을 할 수 없이 체력이 소진되었을 때,
농막 앞 의자에 등을 기대로 앉아 서늘하고 부는 산바람에 땀을 식히는데,
'노루다' 하고 노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쳤더니, 텃밭 주인 김군은 고라니 일거라고 일축했다.
고리니인들, 노루인들 그게 뭐 하는 표정으로 다시 시원한 바람을 쐬다가
"좋네 좋아"
하고 새어나오는 내 소리에 김군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요."
1번 밭 세입자는 연변이 고향인 조선족 여자분인데, 요양보호사를 한다고 했다.
그 분이 김군에게 라디오를 빌리기 위해 잠시 다녀갔다.
보리수, 못 땄다는 말만 남기고.
텃밭주인 김군은
"보리수, 저걸 따야 하는데요. 가지를 잘라서 나눠드려야 할까요? 아님 자리를 깔고 털까요?"
빨간 열매를 달고, 축 늘어진 보리수 나무를 보며 걱정한다.
나는,
"보리수 꽃이 많이도 피었네요. 저 빨간 꽃이 지겠네요. 꽃이라고 치세요." 라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나오는대로 말했다.
텃밭 주인 김군은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이젠 진짜 집에 가야한다고, 천국에서 지상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벌떡 일어나서 집으로 갈 채비를 하는데,
김군은 길다란 전지가위와 돗자리를 챙겨서 큰 보리수나무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전 갑니다.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탔다.
지금은 집인데, 빨갛고, 달고, 떫은 보리수 열매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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