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거리는 완전히 푸르다.
이 거리를 따라 출근한 지가 4년이 되었고,
벚꽃은 해마다 피어, 지고, 푸르렀고, 단풍이 들었고, 낙엽이 되어 떨어졌다.
4년이 아니라 16년이 흐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묶여 한 해이고, 하나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괜히 하나로 이어진 시간이라기 보다,
한 그루의 나무의 둘러싸인 햇빛과 온도, 풍경에 따라 마디가 나누어진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간을 사는 삶의 목표와 아름다움의 지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꽃을 피울 때 나무와
초록이 움틀 때의 나무와
초록을 짙을 때의 나무와
그것들을 떨어뜨릴 때의 나무는
하고자 하는 것과 아름다움의 지점이 너무 다르다.
봄은 겨울이 끝자락에서 만나는 따뜻한 색의 꽃들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그늘을 안겨주는 녹음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옷자락 사이로 떨어지는 낙엽이 아름답고
겨울은 앙상해진 가지로 추위를 견디는 것이 아름답다.
모두 다르다.
그래서 삶이 다르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어느 시간은 내가 꽃처럼 아름답기를, 또 어느 시간은 내가 푸른 잎처럼 당당하기를,
어느 시간은 내 몸에서 힘을 빼고 끝없이 낙하하기를, 어느 시간은 누구도 모르게 겨우 숨만 쉬면서 잘 버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간다.
그 시간들이 지난 다음 나는 간혹 그 때의 그 시간을 아름다웠다 생각한다.
해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아까운 시간이라고 말하면서
점심시간이면 합정동에서 당인리발전소 앞을 지나 절두산 성지, 기독교 선교100주년 공원을 코스로 늘 산책을 했다.
그런데 올해 벚꽃이 한창일 때 나는 그 산책길을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나는 어떤 곤경에 처했고, 어려웠다.
그 곤경이 객관적으로 곤경인지, 물리적으로 곤경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곤경에 처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곤경에 빠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금니를 물고, 이 시간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겨울의 시간은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과는 달리, 나는 떠나지 않았고 제자리에서 견뎌내기로 했다.
단단한 나무 껍질을 뚫고 나왔으나, 하늘거리는 벚꽃처럼
대단히 결연하였으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여전한 일상일 뿐이다.
한 계절이 지났다.
목표와 아름다움이 다른 것은,
다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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