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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새벽 소리

by 발비(發飛) 2018. 8. 7.

멍했다. 어제 종일 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콩 한 통은 먹었다.)

딱히 이유가 있지는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정신이 쏙 빠진거다. 


일을 지시 받았다. 

그런데, 그 일을 해낼 수 없었다. 

그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주는 미팅이 많아 네네, 했던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종일 그 일을 하기 위해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챙겼다. 

벤치마킹을 할 회사의 뉴스, 페이스북, 블로그를 차례로 들어가 10년 동안 그 회사가 한 일들과 성과들을 추적했다. 


말도 안되게 무식한 것은,

그것들을 엑셀에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을 역순으로 정리하며,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서너번 화장실을 간 것을 제외하고는 저녁 7시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오늘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지시 받은 일도 해낼 것 같다. 


멍한 것은 이것때문만은 아니다. 


어제 집에 가자마자 에어컨을 틀고는 

주말에 남긴 음식들을 저녁으로 먹었다. 

적당한 온도의 물을 틀어두고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일찍 자려고 했는데, 실패였다. 

다리가 너무 부어서 힘들었다. 


지난 주 고장나서 버린 세븐라이너가 엄청 그리웠다. 

자려다 말고 핸펀을 켜고는 세븐라이너를 검색해서 주문했다. 

그러다보니 새벽이 되었다. 


진짜 자야지. 하다가 에어컨 소리가 신경이 쓰인다. 

자려다 말고, 방 온도를 체크했다.  


에어컨을 끄고, 문을 열었다.  

새벽의 고요가 나를 편히 잠들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시 누웠다. 그런데, 

윙윙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는 흡사 공장 소음 같았고,

(아마 윗층 아랫층 옆집에서 돌아가는 에어컨 실외기) 

매미는 그 새벽에 점점 더 크게 울었다. 


새벽은 에어컨 실외기와 매미가 경쟁하듯 내는 소리로 빈틈이 없이 꽉 차 있었다. 


포기.


문들 닫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누군가도 나처럼 다시 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고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코브라 자세로 잠시 있었다. 

애기 자세로 잠시 있었다.


핸펀에 저장된 사진들과 동영상을 보았다. 


새벽바다였다. 

여행 중에는 늘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길과 바다와 산을 산책한다. 

새벽에 우는 새소리와 바람소리, 파도소리, 그 사이에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 

그 어우러짐은 세상 어느 곳에서 내는 나의 소리보다 잘 어우러졌다. 






새벽 바다에서 찍은 동영상을 틀어놓고 파도소리를 한참 들었다. 

파도가 쉼 없이 힘 있게 밀려 들어왔다. 

나는 그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 파도는 들어오는 길이 아니라 나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서해는 하루에 두번씩 바다가 저 멀리로 물러나는데, 새벽은 바다가 물러나는 시간이다. 

거세게 힘 있게 물러나는 중이다. 


파도를 피해 몇 발자국씩 뒤로 발을 빼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다. 

다음 파도는 내가 물러난 거리보다 훨씬 더 반대쪽으로 물러나는 중이니까 말이다.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파도가 저 멀리로 사라지고 제 살을 드러낸 갯벌은 파도가 남겨 놓은 아주 조금의 바닷물로 뜨는 해에 반짝인다. 

허물이 갓 벗겨진 맨 살 같기도 해 보고 있다면 괜히 맘이 아리다.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된다. 


그랬다.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비추던 햇빛도,

전철에 끼인 사람들도,

설친 잠으로 멍한 내 머리도,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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