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게 그러하다
발비
여름 소나기 억세게 내리던 날
당신이 비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이 여름 소나기로 세차게 내린다면
우산 따위로 당신을 피하지 않을테야.
그저 회색 하늘 아래 술잔 하나 들고 서 있을테야.
비로 내리는 당신을 술잔으로 가득 받아
당신이 한 잔 한 잔 채워질 때마다 단숨에 마실테야.
내 속으로 흘러들어간 당신이
식도를 긁더라도
위벽을 두 주먹으로 쳐대더라도
애를 끓이더라도
내 속에다 그냥 담아둘거야.
당신이 쿨럭거리며
내 속을 빠져나오려 한다해도
난 두 손으로 내 입을 막고서라도,
당신을 개워내지 않고 내 안에다 둘거야.
여름 소나기 억세게 내리는 날
당신은 내게 그러하다.
그날 나는 피하지 못한 술자리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은 더 감당하기 어렵다.
마침 여름 소나기가 억수같이 내렸다.
타인을 감당한다는 것은
술을 감당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여름 소나기 내리는 길을 걷는 것처럼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
늘 우리 곁에는 타인이 있고,
그 타인은 내게 영원히 이물감을 준다.
나는 여름 소나기를 보며,
타인을 내 몸 속에,
그 이물감을 극복할 수는 없더라도,
익숙함이던, 낯섬이던
어떻든 공존해 보기로 한다.
우산을 던져버리고, 시원하게 비를 맞고 젖은 몸의 자유를 얻듯
쏟아지는 타인들을 그냥 맞아 보기로 작정해 본다.
타인들 중 한 둘이 내게 등을 돌리더라도 나는 등을 돌리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해 본다.
피할 수 없었던 술자리 다음날,
피할 수 없는 술과 몸과의 대전투.
베란다 밖으로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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