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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허연] 싸락눈

by 발비(發飛) 2016. 3. 10.

싸락눈


허연


1

한 시인의 시집을 봤다. 시집 한 권이 전부 성욕이었다. 아! 그는 소멸해가고 있었구나. 우화(羽化)를 끝낸 늦여름 매미처럼 소멸로 가고 있었구나. 그랬구나. 껍질만 남은 그의 시집을 보며, 그의 우화를 보며 '몸'이 곧 그였음을 알겠다. 싸락눈이 쏟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대여섯번 소멸을 생각했다. 


싸락눈은 끊임없이 사선으로 내려와

더럽게 더럽게 죽어가고


2

올겨울을 간신히 넘긴 끄트머리에 매달린 생이 소멸과 친해지고, 갑작스러운 싸락눈 쏟아지는 길에서 생은 싸락눈을 만나 그렇게 더러워진다. 싸락눈 내리는 날, 해(解)를 구하기 위해서 거리는 더럽게 죽어간다. 삼대째 벗어나지 못했다는 눈먼 사랑의 대가가 이 겨울 뭉쳐지지 않는 싸락눈으로 날리고, 세상은 더러워서 눈물겹다. 


올해 마지막 눈이 죽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창 너머는 햇살 가득한 환한 봄 풍경이다. 꽃샘추위라는 일기예보에 겨울내 두르던 목도리를 여전히 목에 칭칭 감고 출근한 사무실 책상 위, 서류 사이에 끼인 시집 [오십미터]를 찾아 오늘도 시점(占)을 보았다. '싸락눈'


사라진 모든 것들은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거리에서도 흔적(痕跡)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뒤끝작렬인 남자처럼 갑작스레 내린 3월의 싸락눈, 앞 뒤로 이어지지 않는 그의 말처럼 뭉쳐지지 않는 싸락눈, 눈먼 사랑의 대가로 사선으로 날리고, 세상은 딱 그만큼 더러워진다.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한다. 오늘은 특별히 강한 봄 햇살이어야 한다. '싸락눈'을 뽑아버린 나의 시점(占)때문에, 싸락눈의 흔적을 없애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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